아트사이드갤러리서 개인전 9월 1일 개막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유럽 여행 책자나 서양 미술사 서적을 들췄을 때 자주 눈에 띄는 단어가 프레스코화다. 회벽에 그린 그림으로,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같은 걸작들이 이에 속한다.
"저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그림을 안 봐주는 거예요. 사람들이 3초만 제 그림 앞에 머물게 할 수 있게 하면 어떨까, 그래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림을 그리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앙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이재훈(39) 작가가 10여 년 전 프레스코화 기법을 접목한 회화 작업을 시작한 이유다.
'조각적 회화'라는 작가의 설명처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에 내걸린 그의 그림들은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부른다. 돌을 연상케 하는 우둘투둘한 질감이 눈에 선명하게 잡힌다.
작가는 마르지 않은 회벽에 바르는 습식 프레스코가 아닌, 건식 프레스코 기법을 응용했다. 장지 위에 석회를 아주 얇게 바른 다음, 장지 뒤에 채색해 은은하게 배어나도록 하는 동양화의 배채법(背彩法)을 활용했다.
4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 '초원의 결투를 위해'에는 신작 회화 12점과 설치 1점이 나온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많은 문화·예술인에게 영감을 주는 시대인 근대다.
개막을 하루 앞둔 30일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작가는 "가장 가까이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찾은 것이 근대"라고 설명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과 매우 흡사한 근대의 풍경이 그를 끌어당겼다고 한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지하 1층에 설치된 거대한 '포 어 파이트 온 더 그린 필드'(2017)이다.
높이 4m 60cm의 회벽색 기둥에 모던걸, 축음기, 화신백화점, 전차 노선도 등 다채로운 근대의 이미지들이 그려져 있다. 1930년대 신문기사에 실린 이미지들을 본뜬 것으로, 네 면 중 한 면은 당시의 기사들에서 발췌한 글자들로 채웠다.
작가는 요헨 게르츠의 작품 '전쟁과 폭력, 파시즘에 대한 기념비'(1940)를 모티브로 했다고 설명했다. 조금씩 땅속으로 가라앉아 결국 사라지도록 설계된 게르츠의 기념비 앞을 지나는 이들은 낙서를 통해 파시즘이 야기한 고통과 분노, 슬픔 등을 기억한다.
아트사이드갤러리는 "시간이 흐르고 눈에서 멀어지면서 기억은 흐려진다"면서 "이재훈 작가의 설치작품은 기억을 환기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기념비에 근대의 광고 이미지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12점의 평면회화 또한 '포 어 파이트 온 더 그린 필드'에서 출발했다.
근대와 현대의 풍경을 관찰하던 작가가 역사라는 개념을 평평한 초원으로 시각화한 작품들이다. 활활 타오르는 나뭇잎들, 몸이 묶인 각목 등 세밀화로 느껴질 정도로 섬세하게 표현한 것이 눈에 띈다.
이번 전시는 9월 24일까지. 문의 ☎ 02-725-1020.
aira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