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세 줄 짧은 시에 새긴 일상의 긴 여운

입력 2017-09-12 10:41   수정 2017-09-12 14:50

두세 줄 짧은 시에 새긴 일상의 긴 여운

이시영 열네 번째 시집 '하동'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형의 어깨 뒤에 기대어 저무는 아우 능선의 모습은 아름답다/ 어느 저녁이 와서 저들의 아슬한 평화를 깰 것인가" ('능선' 전문)

시인 이시영(68)이 새 시집 '하동'(창비)을 냈다. 2∼3행의 짧은 서정시들은 뺄 것도, 더할 것도 없이 단정하고 꾸밈없는 언어로 일상의 정경을 기록한다.

카메라 렌즈에 담아내듯 순간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하이쿠를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란히 귀가하는 형제의 이미지에서 아름다움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는 '능선'의 관찰자처럼, 짧은 시들에는 세상의 사물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애정어린 시선이 묻어난다.

"겨울 속의 목련나무에 꽃망울이 맺혔다/ 세상엔 이런 작은 기쁨도 있는가" ('무제' 전문)

"아파트의 낡은 계단과 계단 사이에 쳐진 거미줄 하나/ 외진 곳에서도 이어지는 누군가의 필생" ('그네' 전문)

여백으로 독자에게 여운을 맡기는 짧은 서정시와 비슷한 숫자로, 시집 한 페이지를 가볍게 넘기는 산문시들이 실렸다. 서정과 서사를 오가는 셈이다. 육하원칙에 따랐더라도 건조하지만은 않다. '산동 애가'는 시인이 태어나던 해에 목숨을 잃은 매형 이야기다. 산수유로 상징되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동족살육의 비인간성을 날카롭게 꾸짖는다.

"남원쪽 뱀사골에 은거 중인 빨치산이 금융조합을 습격한 것은 정확히 밤 11시48분. 금고 열쇠를 빼앗긴 이상직 서기는 이튿날 오전 조합 마당에서 빨치산 토벌대에 의해 즉결처분되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간 아내가 가마니에 둘둘 말린 시신을 확인한 것은 다음다음 날 저녁 어스름. 그때도 산수유는 노랗게 망울을 터뜨리며 산천을 환하게 물들였다." ('산동 애가' 부분)






산문시들은 고향 구례에서 보낸 어린 시절부터 아직 전차가 다니던 1960년대 서울, 부친이 별세한 1972년 겨울까지 시인의 기억 속 시간과 장소들을 불러낸다. 뜻밖에도 21세기 막바지 인류 절멸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실험적인 작품이 있다. 지구를 물려받은 곤충과 동물들이 '연합국'을 선포하고서도 권력투쟁을 벌이는 무대는 강남 한복판.

"전파탐지기에 신호가 잡힌 듯 그때 갑자기 한남대교 방향에서 곤봉을 든 개미 경찰대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인형 쥐들이 스마트폰을 움켜쥔 채 교대역 방향으로 뛰었다. 사방에서 경적이 울리면서 체포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번엔 교대역 방향에서 바이크를 탄 고양이 부대가 무정부군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밤의 교향악' 부분)

1969년 등단 이후 열네 번째 시집을 묶은 시인은 "이 시집을 끝으로 다시는 관습적으로 '비슷한' 시집을 내지 않겠다. 시인으로서의 창조성이 쇠진되었다고 느끼면 깨끗이 시 쓰기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최원식 문학평론가는 발문에 "큰 이야기로 시작하여 작은 이야기를 거쳐 다시 두 이야기가 회통하는 입구에 가까스로 도착한 산화의 촉수는 아직도 살아 있다"고 썼다. 산화(山話)는 고은 시인이 내렸다는 그의 호다. 132쪽. 8천원.

dad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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