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1. 지금으로부터 약 1천600년 전 중국 동진(東晉)의 고승 혜원(慧遠)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주석하며 호계(虎溪)란 이름의 시내를 건너 산문(山門)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안거금족(安居禁足)의 계율을 스스로 정해 엄격히 지키고 있었다. 어느 날 유학자 도연명(陶淵明)과 도교 도사(道士)로 이름난 육수정(陸修靜)이 찾아와 정담을 나눴다. 혜원이 이들을 배웅하며 이야기하다 자신도 모르게 호계를 넘자 뒷산의 호랑이가 울었고, 그제야 세 사람은 혜원이 30년간 지켜온 계율을 깨뜨린 것을 깨닫고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 고사에서 '호계삼소'(虎溪三笑)란 성어가 나왔으며 유(儒)·불(佛)·선(仙) 세 종교, 나아가 종교 간 화합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여러 화가도 이 고사를 그림으로 남겼는데 '여산삼소도'나 '호계삼소도', 혹은 줄여서 '삼소도'라고 한다.
#2. 원불교의 정녀(교무), 천주교 수녀, 불교의 비구니 6명은 1988년 3월께 서울 시내의 서점에서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이웃 종교들의 교리와 여성 수도자 생활 등을 이해할 필요성을 느껴 `원(圓)·천(天)·불(佛)'이란 이름으로 등산과 대화 모임을 시작했다. 이들은 모임을 만든 김에 뜻깊은 일을 해보자고 의기투합, 그해 10월 서울서 치러지는 장애인올림픽의 기금 마련 합창 공연을 펼쳐 수익금을 장애인올림픽 선수촌에 전달했다. 종교 간 화합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이름도 '호계삼소' 고사에서 따 삼소회로 바꿨다. 이들은 매달 정기모임을 열며 '자비로 충만하신 부처님', '사랑의 하느님', '은혜의 본원이신 법신불(法身佛) 사은(四恩)님'에게 세 번씩 모두 9번 절을 올리며 기도를 시작한다. 나중에는 성공회 수녀와 개신교 언님(여성 독신 수도자를 일컫는 말)도 합류했다.
삼소회는 지금까지 음악회와 시화전을 열어 북한 어린이와 장애인을 돕는가 하면 국내외 성지순례에 나서기도 했다. 여성 성직자들에게는 더욱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스님이 절에서 '아베마리아' 노래를 연습하고 수녀가 수녀원에서 찬불가를 부르다 보니 교단 내부의 질책과 비판도 쏟아졌고 주위의 오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천주교 교황 베네딕토와 티베트 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이들을 만나 격려한 것이 상징하듯 이제는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져 교단마다 이들의 활동을 돕고 있다. 일반 신도도 삼소회 모임과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삼소회원끼리 함께 길을 걸으면 "보기 좋다"고 말하며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3. 1965년 10월 어느 날 조계종 총무부장 능가 스님은 서울 낙원상가 떡집에 떡을 주문했다가 "중한테는 안 팔아요"라는 대답을 들었다. 떡집 안에 십자가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능가 스님은 크리스천아카데미 원장인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에게 모임을 제안했다. 강 목사의 주도로 그해 10월 18일 노기남 주교 등 6개 종단 핵심 지도자들이 서울 용당산호텔(지금의 한강호텔)에서 모인 것이 종교 간 대화 모임의 시초였다. 이는 그해 12월 21일 한국종교인협회 결성으로 이어졌으나 지지부진하다가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ACRP) 3차 총회가 1986년 6월 서울에서 열린 것을 계기로 한국종교인평화회의(ACRP)가 출범했다. 지금은 개신교·불교·천주교·원불교·천도교·유교·민족종교 7개 종단 대표와 신도들이 참여하고 있다. 1997년 3월에는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도 창설됐는데 이는 개신교 연합기구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로 양분된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이밖에 세계종교평화협의회, 한국종교연합(URI), 한국종교협의회 등의 단체도 있다.
우리나라는 종교의 표본실이자 전시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지배적인 종교가 없으면서도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각기 다른 신앙을 갖고 있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단순히 숫자만 많은 게 아니라 우리나라로 들어와 꽃을 피우거나 우리나라에서 탄생해 해외로 전파된 종교도 적지 않다. 무속 등 토착 신앙, 불교·유교·기독교 등 외래종교, 19세기 이후 발생한 천도교·증산교·원불교·대종교 등 민족종교, 해방 후 탄생한 신흥종교에다가 최근 글로벌 추세에 따라 이주민과 함께 유입되는 각국 고유 종교까지 헤아리기 힘들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종교 갈등도 끊이지 않는다. 교단 간·교단 내 대립뿐만 아니라 종교로 인한 가족, 이웃 간, 직장 내 불화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성당과 법당에 불을 지르는가 하면 불상 목을 자르고 탱화나 마애불을 훼손하는 행위도 있었다. 최근 들어서는 종교 유적지를 놓고 천주교와 불교, 불교와 유교가 마찰을 빚고 있다. 여기에 할랄 푸드(이슬람 율법에 따라 도살·가공된 식품) 공장 설립 논란과 이슬람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테러 등을 계기로 이슬람권 국가 출신 이주민을 상대로 반감을 표시하는 일도 잦아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차례 종교전쟁을 치른 유럽이나 지난 세기부터 세계의 화약고로 꼽혀온 중동처럼 극단적인 충돌 양상으로까지 번지지는 않고 있다지만 최근 사례를 보면 우려를 떨칠 수 없다. 종교 간 갈등이 깊어져 인종 편견 등과 맞물리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유일신을 신봉하는 종교들의 경우 교리상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지만 오늘날 현실은 다원주의 추세를 되돌리기 어렵다.
오는 26∼27일 광주광역시 빛고을체육관과 전남 화순군 금호리조트에서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주최로 이웃종교화합대회 개막식과 전국종교인화합마당이 열린다. 이 자리에는 7개 종단 회원 300여 명이 모여 게임과 운동을 펼치며 소통과 화합을 도모할 예정이다. 이번 행사에 참여한 종교인 모두 이웃 종교에 대한 편견을 불식하고 이것이 씨앗이 돼 우리 사회 전체로 평화의 기운이 번져나가기를 기원한다. 내 종교가 소중하면 남의 종교도 소중하고, 이웃 종교를 제대로 알아야 내 신앙도 더 깊어지는 법이다.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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