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윈 그린 여사 생일 13년 챙겨…이사 계획에 마지막일 수도
(시드니=연합뉴스) 김기성 특파원 = 21일 오후 호주 시드니의 파라마타 강에서 가까운 한 주택에서는 한인들과 호주인들 약 40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생일잔치가 열렸다.
이날 생일잔치의 주인공은 94번째 생일을 맞은 올윈 그린 여사.
생일 케이크를 받아든 그린 여사는 이날 금세 눈물이라도 쏟을 듯 붉어진 얼굴로 "한국은 특별한 인연을 맺은 나라"라며 "해마다 잊지 않고 찾아와줘 너무 고맙다"고 감사를 표시했다.
그린 여사는 올해 특별히 주시드니한국문화원이 초청한 한인 해금 연주자가 '아리랑'과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년 작)의 주제곡 '문 리버'(moon river)를 연주할 때는 한껏 감상에 젖는 모습을 보였다.
한쪽에는 양측에서 준비해온 잡채와 전, 김밥, 과자, 빵 등도 준비됐다.
그린 여사는 1950년 9월 말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북한 정주 전투 부상으로 그해 11월 31살의 나이로 숨진 찰리 그린 중령의 아내다.
그린 중령은 한국전에서 연천·박천 전투 등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앞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북아프리카와 그리스 등에서 전공을 세우는 등 호주에서는 전쟁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27살 때 먼 이역에서 남편을 잃고 그곳에 남편을 묻은 그린 여사는 다시 결혼하지 않고 당시 3살인 외동딸 앤시아를 홀로 키웠다.
그 사이 남편의 전기를 쓰거나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과 함께 전몰 호주 장병을 기리는 대형 자수를 새기는 등 남편을 기리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또 한국전 기념행사 등 시드니 한인사회의 주요 행사에도 자주 참석하는 등 함께 전쟁을 치른 양국 관계의 상징적인 인물로도 꼽힌다.
시드니 한인사회가 그린 여사와 본격적이고 지속적인 접촉을 하게 된 것은 20여 년 전인 1990년대 중반.
당시 ROTC 호주지회장을 맡고 있던 김기덕 전 시드니 한인회 부회장이 한인신문에 난 "한국전쟁은 잊힌 전쟁이다"라는 그린 여사 인터뷰를 접하고는 위로와 감사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에 만나게 되면서다.
김 전 부회장은 이후 자신들의 연례행사에 그린 여사를 초청해 우의를 다졌으며, 13년 전부터는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호주총연합회(총회장 이윤화)와 6·25참전유공자회 호주지회 회원들과 함께 매년 그린 여사의 생일잔치를 주선했다.
그린 여사의 아들을 자임하는 김 부회장은 "얼마 전까지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등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다"며 "그린 여사와의 교류를 통해 열정과 꿋꿋함 등 오히려 많은 것을 배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올해의 생일잔치는 예년 같지 않게 차분하면서도 많은 아쉬움 속에 진행됐다.
그린 여사의 건강이 좋지 않고 병원에 가야 할 일이 많아 곧 딸 앤시아가 있는 멜버른 쪽으로 이사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린 여사는 "나를 챙겨주던 한인들과 헤어지게 돼 슬프다"면서 "멜버른으로 가더라도 계속 연락을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한국 쪽에서 윤상수 시드니 총영사 부부와 안신영 한국문화원장을 비롯해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회원 등 약 20여 명이 참석했으며 호주 쪽에서도 한국전 참전군인을 비롯해 보훈처와 호한재단 관계자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그린 여사는 사후에는 남편 찰리 중령이 영면한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합장 되기를 희망하고 있고, 전례가 있는 만큼 별 어려움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린 여사는 지난해 10월에는 "후손들이 전쟁의 고통과 상실을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며 유엔기념공원 내 기념관에 가로 247㎝, 세로 189㎝ 크기의 대형 퀼트 작품 제작을 제안해 성사시켰다. 이 작품은 영구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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