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과 지지고 볶은 35년…경쟁하며 여기까지 왔죠"(종합)

입력 2017-09-26 18:02   수정 2017-09-26 18:03

"작가들과 지지고 볶은 35년…경쟁하며 여기까지 왔죠"(종합)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상 받은 이호재 가나아트·서울옥션 회장

전속작가제 첫 도입 등 공로 인정받아…"그림값은 국격이란 생각 유효"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서로 얼마나 지지고 볶았는데요. 싸우면서 세월을 보냈죠."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2층의 '동행' 전시장을 찬찬히 둘러보던 중년의 남자가 가벼운 웃음과 함께 말했다.

김병기, 임옥상, 오수환, 황재형 등 한국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들과 길게는 35년을 '동행'한 이 남자는 이호재(63) 가나아트·서울옥션 회장이다.

미술 전공자도 아닌 그가 인사동 골목의 건물 2층을 빌려 18평 규모의 화랑을 낸 것이 1983년, 그의 나이 29살 때였다.

우리글 중에서 가장 발음하기도 쉽고 아름답게 들리는 '가나다라'에서 따서 이름을 지었다는 가나화랑은 갤러리와 경매회사, 문화재단, 아틀리에까지 망라하는 대표적인 미술 기업으로 거듭났다.

한국 미술사에서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겨온 이 회장은 몽블랑문화재단이 매년 문화예술 발전에 이바지한 이들에게 수여하는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상의 올해 한국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가 30여 년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 이번 수상은 다소 늦은 감마저 있다.

1984년 국내 최초로 전속작가제를 도입해 유망 작가들이 작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했고, 이듬해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적 아트페어인 피악(FIAC)의 문을 두드렸다. 파리 시테 스튜디오, 장흥 아틀리에 등 작가를 위한 창작 공간도 국내외에 여러 곳 세웠다.





26일 시상식을 마친 이 회장을 가나아트센터에서 인터뷰했다. 그는 "아무래도 가나화랑이 작가들과의 관계를 중요시해왔다는 점에서 이번 상이 더 뜻깊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이 회장의 첫 작가는 한국화가인 박대성이었다. 옛 한국일보사 앞에 있던 태인화랑에 들렀다가 15만 원을 주고 박대성 작품을 산 것이 계기가 됐다(당시 직장인 월급은 20만 원 수준이었다). 이후 수많은 작가가 이 회장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당대에 이미 거물인 작가들 대신, 유망한 작가들을 찾아내려 애썼다.

두터운 우정을 쌓은 임옥상 화백의 작품을 응시하던 그는 '딴짓'만 하던 임 화백을 지원한 배경으로 "시장에는 맞지 않을지 몰라도, 다른 작가와 분명히 다른 점이 있고 미술사적으로도 빼놓을 수 없는 작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설명했다.

"사람이 자기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잖아요. 작가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다면 참 보람차겠다 싶었어요. 작가들과 의기투합하면서 작가다운 작가 해봐라, 나는 화상다운 화상 하겠다라고 말하곤 했죠."

요즘도 가까운 작가들과 소주를 즐긴다는 이 회장은 작가와 화랑의 관계를 '경쟁'으로 규정했다.

그는 "작가는 숙제를 풀어야 하는, 즉 내게 계속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고 애써야 하는 입장인 셈이고, 나 또한 많은 자극을 받는다"라면서 "작가들에게 스트레스처럼 느껴줬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경쟁 관계'라는 말을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일화도 숱하게 많다. 1980년대 중반 국내에서는 잊힌 존재였던 김병기 화백의 귀국전을 성대하게 열어 국내 활동을 재개하게 도운 것도 이 회장이다. 101세 최고령 현역 작가인 김 화백은 내년에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다시 연다.

이 회장은 자신의 달려온 길의 주요 변곡점으로 1998년 경매회사인 서울옥션 설립과 2014년 가나문화재단 설립을 꼽았다.

한국 미술계의 어른이 된 그는 부유층의 영역이라는 편견, 위작 문제 등으로 더 어려움을 겪는 미술 시장에 조언을 요청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한국 상업화랑의 역사가 아시아 전체와 비교해도 약하지 않음에도 그만한 대우를 못 받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미술 시장을 좀 애정이 어린 시선으로 봤으면 해요. 어떤 이유든 간에 컬렉션을 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미술관 건립이나 작품 기부 등 사회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시장은 컬렉터가 만들어온 것이고 화상은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인데 우리가 과연 컬렉터를 대우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는 양도세 등의 문제도 언급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문화 소비를 일으키는 정책을 펴야 한다"라면서 "그림값은 국격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대중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진위작 문제를 두고서도 "시장이 성숙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이 문제가 미술 시장의 핵심이 되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앞서 이날 오전 열린 시상식에서 몽블랑문화재단의 샘 바더윌·틸 펠라스 공동 이사장은 "예술가들이 기량을 맘껏 펼칠 수 있도록 묵묵히 지원해 준 후원자를 조명하는 이러한 시상식을 통해 수상자의 열정이 다음 세대 젊은이들에게 전해지고 영감을 줄 것"이라고 밝혔다.

이 회장 수상 기념 전시인 '동행-가나아트와 함께 한 30년'은 10월 15일까지 열린다. 김병기, 박대성, 권순철, 임옥상, 고영훈, 황재형, 유선태, 전병현, 박항률, 사석원, 오수환, 박영남, 안종대, 최종태, 한진섭 등 15명 작가가 참여했다.

ai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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