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말이고 나의 글이네"…고은의 생애와 詩세계

입력 2017-09-28 08:40   수정 2017-09-28 09:54

"나는 나의 말이고 나의 글이네"…고은의 생애와 詩세계

대담집 '고은 깊은 곳'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너는 누구냐는 질문은 더 이상 추상적일 수 없다네. 나는 나의 말이고 나의 글이네. 그리고 나의 말과 글을 잃어버리는 그 치매의 소실이 나의 내일일 것이네. (…) 나는 나인가 무엇인가라는 도식의 질문으로라면 그렇네, 나는 무엇이네! 무엇이 나라네!"

시인 고은(84)은 소설가이자 시인인 김형수와 대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이름으로 일본어를 '국어'로 배웠던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모국어와, 자신의 삶을 '모국어에의 헌신'과 동일시한다. 고은의 정체성은 '존재와 언어의 통일'을 전제로 성립한다.

'고은 깊은 곳'은 두 사람의 대화로 고은의 삶과 생각, 시 세계를 탐색하는 책이다. 작년 봄부터 네 차례에 걸쳐 계간지 아시아에 수록된 대담을 묶었다. 이육사의 '광야'로 시를 처음 접한 중학생 때부터 아시아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활동하는 오늘날까지 고은의 문학적 여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죽음이 얼마나 삶을 모독하는가를 죽음이 얼마나 삶 따위를 가소롭게 하는가를 소년인 나는 아무런 정신이나 의식의 단련 없이 체험한 것이었네. 어쩌면 내 근원의 허무주의야말로 이런 죽음의 극한 상태에서 발생했는지 모른다네. 이런 1953년 가을 이후 살아남은 자로서 허무가 나의 허무였음을 나는 뒤에 깨달았네."

한국전쟁 이후 시인의 의식에는 죽음이 일상적으로 자리 잡았다. 죽음과 동행하던 시인의 삶은 1970년 겨울 또다른 죽음을 목도하면서 극적으로 방향을 돌린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시인의 의식과 정서에 현실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개헌 강행에 저항하는 작가선언에 뛰어들고, 현실참여 문학인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했다.

"그때부터 나는 늘 앞에 나서야 했다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내 10년의 무서운 불면증이 일시에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네. 그때부터 나는 잘 자고 뼈에 살점이 붙기 시작했어. 내 눈동자도 맑아지기 시작했어. 나는 그 이래 한 마리의 질주하는 저 중앙아시아 스키타이의 말이 되기 시작했지. 나의 시는 그 말 울음소리가 되었고."







'별이야말로 밥이다. 밥이야말로 별이다'로 요약되는 이른바 '고은 테제'가 1970년대 후반부터 형성됐다. 허구와 현실은 분리되지 않거나, 허구야말로 궁극의 현실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시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의 그 현장인 칠현산 자작나무는 실제로는 없네. 내 심상 속의 현실에서만 있는 숲이었어."

세계무대로 활동 폭을 넓힌 1990년대 이후의 이야기들도 풀어놓는다. 20여 년 동안 외국의 시 축제 등 행사에 100회 가까이 초청받으면서 "어쩌면 지난 시대의 그 출국금지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것인가" 여긴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아제르바이잔어·타밀어·방글라어·아이슬란드어·힌디어 등 소수언어로도 번역되고 있다.

"일부러 헤아려 보니 지금까지 내 시와 소설이 번역된 외국어는 32개쯤 되네. 눈물겨운 일은 지금 수난 속의 쿠르드족 쿠르드어로도 내 시가 번역된 일이네. 그 피어린 독립운동 중에서도 동아시아 시를 찾는 것은 너무 감동적이었네." 224쪽. 1만3천원.

dad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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