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제 모든 것을 너무 하얗게 불태워서 지금은 재만 남은 상태입니다."
최근 만난 영화 '남한산성'의 황동혁 감독은 몹시 지쳐 보였다. "죽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는 작품을 만들겠다"며 온몸을 불살라가며 영화를 찍은 탓이다.
황 감독은 "제대로 예산(150억원)이 뒷받침된 상태에서 좋은 원작을 바탕으로, 이렇게 좋은 배우들을 데리고, 비극적인 영화를 찍는 일은 앞으로 경험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 '마이 파더'로 데뷔한 황 감독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도가니'(2011)로 한국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며 관객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휴먼코미디 '수상한 그녀'(2014)로 865만명을 동원하며 입지를 다졌다.
다음은 황 감독과의 일문일답.
-- 소설 '남한산성'을 영화화하게 된 계기는.
▲ 첫 번째는 척화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의 캐릭터와 논쟁이 가슴에 와 닿았다. 다른 생각과 철학을 지녔지만, 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철학적이면서도 처절하고, 시 같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말들에도 매료됐다. 또 하나는 소설에 묘사된 남한산성 안의 풍경과 그 속에서 벌어진 일들, 한겨울의 살풍경한 모습은 창작자로서 영상으로 옮겨보고 싶을 정도로 강렬했다.
-- 원작과의 싱크로율이 무척 높다.
▲ 김상헌과 최명길의 치열한 대화 등 원작의 감흥을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다. 또 인조와 영의정 김류, 대장장이 서날쇠, 이시백 등 저마다 존재의 정당성이 있는 인물들이라 다 담아내고 싶었다.
-- 이병헌, 김윤석을 캐스팅한 이유는.
▲ 최명길은 자칫 밋밋하고 평면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인물이다. 시종일관 자신의 톤으로 논리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이 인물을 제대로 보여주려면 진정성 있는 눈빛과 목소리가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 이병헌이 제격이었다. 김상헌은 불같은 뜨거움과 바위 같은 단단함, 동시에 인간미 같은 틈새가 엿보이는 사람이어야 했다. '추격자'에서 연쇄살인마를 쫓던 김윤석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그동안 한 작품에 출연한 적이 없어서 새로운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두 배우의 연기는 어땠나.
▲ 객석에 앉은 관객의 입장에서 바라봤다. 후반부 토론 장면은 카메라 두 대로 동시에 각각의 인물을 담으며 한 호흡으로 찍었다. 마치 실제 싸우듯이, 마치 랩 배틀을 하듯 연기했다. 손에 땀을 쥐고 봤다.
-- 박해일과 고수를 발탁한 배경은.
▲ 캐스팅에 가장 공들인 배우가 박해일이다. 원작을 읽는 순간 인조 역에 박해일이 떠올랐다. 인조의 파리함, 나약함, 우유부단함, 흔들림을 모두 가진 배우는 박해일밖에 없었다. 박해일은 캐스팅 제안을 두 번 거절했다. 그래서 박해일과 만나 10시간 가까이 술을 마시며 대화를 했다. 영화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나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 같더라. 결국, 며칠 뒤 출연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대장장이 서날쇠는 비록 천민이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말수가 적고 신중하고, 매사 사려 깊은 사람이다. 그래서 잘 생긴 고수도 어울릴 것으로 생각했다.
-- 영상·미술·조명·색감 등 미장센도 인상적이다
▲ 촬영 전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 같은 영화를 많이 봤다. 또 김훈 작가의 문장은 힘이 있고, 뜨거우면서도 차가움이 느껴졌다. 그런 대조의 느낌을 표현하려 강렬한 클로즈업과 멀리 관조적으로 보이는 익스트림 롱샷을 사용했다. 김상헌이 사공을 칼로 베는 첫 장면이 대표적이다. 사공의 붉은 피를 클로즈업하다가 멀리 산과 강이 보이게 롱샷으로 빠지는 식이다. 동양화 같은 느낌, 을씨년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느낌을 내려고 채도가 낮은 색을 사용했다. 채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임금의 용포와 백성, 병사들이 흘리는 피뿐이다.
-- 겨울에 촬영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특히 언 강 위에서 찍은 첫 장면이 가장 어려웠다. 양구에 있는 소양강에서 찍었는데, 얼음이 25㎝ 두께로 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봄이 다가올 때 즈음 마지막 추위가 닥치면서 촬영할 수 있었다. 눈이 내리지 않은 날도 많아서 미국에서 인공눈을 수입해 바닥에 깔고 찍었다. 설경을 담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가장 애정이 가는 장면은.
▲ 북문전투 장면이다. 가장 많은 규모의 말과 장비, 인원이 동원했다. 그 장면을 찍는 데 6일이 걸렸다. 한날 한 장소에서 벌어진 전투여서 날씨가 맞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남한산성 안에서 위정자들의 잘못된 선택이 백성들을 어떻게 죽음으로 내모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 영화를 11장의 챕터로 나눴는데.
▲ 젊은 관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동시에 이번 챕터에서는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면 좋을지 일종의 맥락을 짚어주는 의미도 있었다. 어떤 젊은 관객은 "마치 게임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느낌이 든다"는 이야기도 했다. 쉽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 지금까지 연출한 4편의 영화 모두 장르가 다르다.
▲ 사회고발 영화의 시초가 된 '도가니'를 찍은 뒤에 사회고발 유의 시나리오만 들어왔다. 그러나 '도가니'를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아 안 했다. 그 뒤로 '수상한 그녀'를 찍고 나니 코미디 영화만 들어왔지만, 제가 하고 싶은 코미디를 다 했기 때문에 더 잘할 자신이 없었다.
-- 이번 작품은 모든 면에서 전작들보다 일취월장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 영화감독으로서 죽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을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부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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