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몰려 천직 잃고 고향 등지고…인생은 풍비박산

입력 2017-10-11 07:05  

간첩 몰려 천직 잃고 고향 등지고…인생은 풍비박산

'빨갱이' 된 납북어부 박춘환씨, 49년 만에 반공법 혐의 무죄

(전주=연합뉴스) 김동철 기자 = 스산한 세월이었다. 민초는 폭압의 세월에 꺾였다.

전북 군산시 옥도면 개야도가 고향인 박춘환(71)씨는 고기잡이를 천직으로 알았다.

7남매의 장남인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 가족을 부양하려고 열다섯 살부터 물길 따라 살았다.

그때도 만선을 기대하며 배에 올랐다.


그는 1968년 5월 연평도 근해에서 북한 경비정에 납북돼 4개월간 억류됐다.

구사일생으로 고향으로 돌아왔건만 그에겐 '간첩'이란 꼬리표가 붙었다. 집안은 쑥대밭이 됐다. 이웃들은 수군댔고 친구들과 술 한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반공법 혐의로 기소돼 1년 가까이 교도소에서 보냈다.

출소 후 남은 것은 가난과 질병뿐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기관원들은 항상 그의 집을 배회했다. 숨 막히는 세월이었다.

1972년 군산경찰서 경찰관들에게 끌려가 참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납북되었을 당시 북한에 포섭된 간첩'으로 조작됐다.

낮에는 여관으로 끌려갔고 밤에는 경찰서에서 각종 고문을 당했다.

경찰들은 잠 안 재우기, 통닭구이, 전기 충격 고문, 고춧가루 물 코에 붓기 등을 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몸은 물론 정신까지 무너졌다.

지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 동갑내기 친구의 이름을 불었다. 간첩으로 포섭하려 했다는 허위 진술이었다.

'북에서 가져온 책을 건넸고 북한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는 박씨의 허위증언 때문에 친구는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경찰은 '박씨가 북한 간첩인 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았다'며 불고지죄를 적용해 친구를 구속했다.

친구가 간첩으로 엮이는 과정에서 작은 섬 개야도는 침묵과 외면, 불신에 휩싸였다.

친구는 억울하게 8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간첩 아닌 간첩이 된 박씨도 7년의 감옥살이 끝에 풀려났다.

'빨갱이'란 냉대와 경찰의 감시로 고향에서 살 수 없었다. 친구의 얼굴을 볼 낯도 없었다.

1980년대 연고가 전혀 없던 충청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몽둥이와 구둣발로 얻어맞은 후유증으로 엉덩이뼈와 어깨뼈가 모두 부러졌고 제대로 걸을 수 없지만, 일용직, 공장 야간경비 등 각종 궂은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왔다.

지금도 건강이 좋지 못하다.

개야도, 납북, 간첩, 경찰…. 박씨에겐 끔찍한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을 들을 때면 지금도 소스라친다.

박씨는 "완전히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이렇게 나이가 먹은 게 억울하다. 이게 사람 손이냐"면서 "정부가 너무 야속하고 상처가 너무 커 다시는 고향에 가고 싶지 않다"고 고개를 떨궜다.

전주지법 형사1부(장찬 부장판사)는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각 8개월과 1년 6개월의 징역살이를 한 박씨 등 납북어부 3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고 11일 밝혔다.

재판부는 "유죄 증거들이 수사단계에서 불법구금과 고문 등 가혹 행위로 만들어져 증거능력이 없거나 신빙성이 없다"고 무죄 이유를 설명했다.

박씨가 1972년 북한을 고무·찬양하고 국가기밀을 탐지·수집하는 간첩 행위를 한 혐의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아 만기 출소한 사건에 대해선 이미 2011년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됐다.

이와 별개로 박씨가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8개월간 옥살이한 사건에 대해선 이번에 재심에서 두 번째 무죄가 선고됐다.

한 피고인이 두 차례의 재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은 건 이례적인 일로 평가된다.

그가 누명을 벗고 '완전한 자유인'이 되기까지 강산이 다섯 번 변했다.

이 사이 그를 고문하고 간첩으로 몰았던 경찰관 10여명은 모두 세상을 등졌다.

sollens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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