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테리 보더, 사비나미술관서 '먹고·즐기고·사랑하라' 展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이 둘은 엄마와 아들일 수 있죠. 자, 이 빨간 파프리카로는 무엇을 할까요? 아빠일 수도 있겠네요."
한 손에 펜치를 쥔 남자의 크고 굵은 손가락이 쉼 없이 움직였다.
그가 순식간에 철사를 잘라 구부리고 돌린 뒤 파프리카에 쏙 찔러넣자 그럴듯한 사람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남자가 세 가족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동안, 그를 지켜보던 아내는 웃음과 함께 "이런 음식이 있으면 남편이 항상 작업해서 음식물을 볼 때마다 내가 과연 요리를 해도 괜찮은지 고민된다"고 말했다.
일상 속 사물에 철사로 팔다리를 붙인 뒤 캐릭터와 이야기를 창조하는 작가 테리 보더(52)의 개인전 '먹고·즐기고·사랑하라'가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린다.
전시 개막을 앞두고 아내와 함께 처음 한국을 찾은 보더를 미술관에서 12일 만났다.
"오브제를 뜯어보면서 공부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을 매우 좋아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사물을 보면 사물에 감정이 있고 살아있다고 생각하는데 제 작업도 그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슈퍼마켓이나 시장은 그에게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캐낼 수 있는 보물창고다. 하루에 한 번은 마트를 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각각 과일잼과 땅콩버터를 잔뜩 묻힌 식빵 두 쪽도 보더의 손을 거치면 꽃 한 송이를 매개로 구애하는 남녀로 변신한다(작품 '꽃을 건네는 마음'). 휴지가 얼마 남지 않은 두루마리 심들도 오싹한 미라가 된다(작품 '화장지 미라').
미국 밖에서 전시를 열어본 적 없는 보더가 국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유명해진 것은 단순한 의인화를 넘어 작품 전반에 흘러넘치는 재치와 유머 덕분이다.
한국 전시를 위해 제작한 '매끄러운 피부 관리' 앞에서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 대추가 쭈글쭈글한 주름을 없애려고 마스크팩을 붙인 작품이다.
미국에서 대추를 받아들고 자료를 검색했다는 작가는 "피부 미용에 좋은 성분이 있다는 대추가 주름이 많다는 점이 흥미로웠다"면서 "한국 마스크팩이 유명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면서 작품을 만들어보았다"고 설명했다. '슬픈 안녕'은 한국 라면을 끓일 때 물에 둥둥 뜨는 면발이 뗏목 같다는 생각에 만든 작품이다.
부조리한 사회상을 예리하게 겨누는 작품도 있다. 하얀 계란이 '유색인 전용'(colored only)이라고 적힌 알록달록 계란 바구니 앞에서 홀로 슬퍼하는 장면을 담은 '왕따 계란'은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풍자한다.
작가는 먹고 즐기고 사랑하는 일 중에서 으뜸은 즐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나 자신이 즐거워야 한다"는 작업 동기와도 맞닿아 있다.
대학 졸업 후 광고 사진가로 일하던 작가는 일에 큰 회의와 피로감을 느꼈다. 제품 하나를 촬영할 때 구도 하나도 마음대로 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밥벌이를 위해 14년간 버텼지만, 결국 2001년 일을 그만뒀다.
그는 보험 때문에 식료품점 제빵사로 다시 취직해야만 했다. 2006년 어느 날 식료품점의 선반에 나란히 놓인 레몬과 레몬 모양의 레몬즙 제품을 유심히 본 것이 인생을 바꿔 놓았다.
"가짜 레몬이 옆에 있는 것이 진짜 레몬에는 매우 모욕적일 것으로 생각했어요. 둘이 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했고요. 그러다가 레몬즙 제품이 진짜 레몬이 우편으로 주문한 일종의 '섹스 토이' 같다는 생각을 했죠."
그렇게 탄생한 것이 그의 첫 작품인 '우편주문 신부'다. 이 작품은 사비나미술관 2층에 전시 중이다.
이번 전시에는 사진 62점, 입체작품 72점, 애니메이션 1점이 출품됐다.
"저는 이런 작품들을 만들면서 이상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도망치곤 합니다. 한국인들이 그냥 제 작품을 보면서 즐겨줬으면, 이런 세상에서 함께 도망쳤으면 좋겠습니다."
전시는 12월 30일까지. 문의 ☎ 02-736-4371.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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