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서 교수 "초기엔 성씨가 혈족 구별 기능…말기엔 성씨집단 해체돼"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신라 초기 왕은 대부분 박씨(朴氏)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박씨는 약 230년 동안 아달라 이사금(재위 154∼184)까지 7명이 신라를 통치했다.
박씨 왕조에 균열을 가한 성씨는 석씨(昔氏)였다. 탈해 이사금(재위 57∼80)이 제4대 왕에 올랐고, 아달라 이사금 이후 7명의 석씨 왕이 배출됐다.
박씨와 석씨가 왕위를 양분하던 신라에 새롭게 등장한 성씨는 김씨(金氏)였다. 미추 이사금(재위 262∼284)이 김씨로는 처음 제13대 왕이 됐고, '마립간'이란 왕호를 최초로 쓴 제17대 내물왕(재위 356∼402)부터는 김씨만 왕좌를 차지했다.
김씨 왕조는 통일의 과업을 달성한 문무왕(재위 661∼681)을 거쳐 효공왕(재위 897∼912)까지 550여 년간 이어졌다. 그런데 신라가 멸망하기 직전, 신덕왕(재위 912∼917)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다시 박씨에게 넘어갔다. 공고했던 김씨 왕조는 왜 갑자기 무너진 것일까.
이종서 울산대 교수는 학술지 '역사와 현실' 최근호에 실은 논문 '신라 진골 성씨의 성립과 기능 변화'에서 "한때는 성씨가 하나의 혈족집단을 표현하는 역할을 했지만, 후대에는 점차 성씨집단의 개념이 약화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는 신라에서 최초로 성씨를 칭한 인물은 진흥왕(재위 540∼576)이라고 주장했다. 이전까지는 성(姓)에 대한 관념이 없었는데, 진흥왕이 처음으로 '김진흥'(金眞興)이라는 이름을 대외 관계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신라에는 초창기 혁거세, 알지, 탈해를 시조로 숭앙하는 귀족 혈족집단이 있었을 것"이라며 "진흥왕이 김씨를 칭하면서 혁거세를 추종하는 집단은 박씨, 탈해를 섬기는 집단은 석씨를 성으로 채택한 것 같다"고 추정했다.
김씨는 세 성씨 가운데 가장 강한 권력을 갖게 됐고, 혈족집단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했다. 하지만 왕권이 강화하면서 임금은 혈족집단에 의존할 이유가 사라졌다. 그 결과 왕이 특정인에게 성을 하사하기도 했다. 가야계인 김유신이 김씨 성을 사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 교수는 "후대에는 김씨가 단일한 성씨집단이 아니라 분열된 상태였다"며 "이러한 사실은 9세기 중반에 김씨인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이 서로 살육하며 왕위를 다퉜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9세기 초반의 애장왕, 헌덕왕, 흥덕왕은 혁거세를 모신 시조묘에 제사했다"며 "성씨별 분립 의식이 소멸해 혁거세가 김씨를 포함한 진골 귀족 전체의 선조로 숭앙됐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김씨 사이의 동질의식이 희박해지자 박씨도 왕이 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박씨인 신덕왕은 김씨인 효공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을 때 추대 형태로 왕이 됐다. 평화로운 왕위 이양이었던 셈이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효공왕의 왕비가 박씨였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성씨집단이 해체하면서 결국 개인을 기준으로 한 혈연의식이 강화됐을 것"이라며 "박씨 국왕의 재등장은 김씨와 박씨로 구성된 진골이 혈연을 통합적으로 인식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신라 말기에는 부계와 모계를 모두 따르는 '양측적 혈연의식'이 확대됐고, 이는 '양측적 친속조직'으로 발전했다고 덧붙였다. 즉 진골이라는 귀족 집단이 중요했을 뿐, 성씨는 더 이상 특정 세력을 가르는 기준으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신라 후기에는 혈연의 친소만 따졌고, 성씨의 같고 다름은 신경 쓰지 않았다"며 "고려 지배층에서 확인되는 양측적 친속관계의 연원은 신라 하대 진골까지 소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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