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오늘은 조선 문화사상 잊지 못할 날이다. 사백팔십칠 년 전(세종 이십팔 년 서기 일천사백사십육 년) 오늘에 조선 문자가 세종대왕의 손으로 창정(創定)되어 처음으로 반포(頒布)되엇고 사백팔십칠 년 뒤인 오늘에 조선어의 철자법이 반포되게 되엇으니 조선사람된 자 다가치 영원히 기념할 오늘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동아일보 1933. 10. 29. '철자법통일안 반포까지의 경과')
1933년 10월 29일 한글날. 당시는 한글날이 10월 29일이었다. 이날 조선어학회는 세종대왕의 한글 반포 487주년을 기념하여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정식으로 공표했다. 이 통일안은 1937년, 1940년, 1946년 세 차례 내용 수정을 거쳐 1948년 정부가 공식적으로 채택, 오늘날까지 올바른 한글 표기의 기준이 되고 있다.
1894년 11월 21일. 고종은 법률과 칙령, 공문서는 한글을 기본으로 하고, 필요에 따라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쓰도록 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렸다. 이로써 한글은 창제된 지 450여 년 만에 우리나라의 공식 문자가 됐다. 고종은 이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홍범 14조를 한글, 한문, 국한 혼용문 세 가지로 작성하여 발표했다.
당시 한글은 일반 백성 사이에서는 널리 쓰였으나 언문이라 불리며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글은 공식 문자가 되기는 했으나 맞춤법이 통일되어 있지 않아 사용이 제각각이었다. 맞춤법 통일안을 마련하기 위해 1907년 학부 내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고 주시경, 어윤적, 지석영 등이 연구보고서 '국문연구'를 작성했으나 1910년 국권침탈로 국문연구소가 해체되고 '국문연구'도 빛을 보지 못했다.
이후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조선인 학자들과 일본인 학자들이 모여 1912년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을 만들어 초등학교 교과서에 사용했다. 이 맞춤법은 사실상 일본인의 한국어 습득을 쉽게 하고, 조선인의 일본어 학습에 한글을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한글 표기를 일본어의 발음에 맞게 퇴보시켰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무단정치가 문화정치로 바뀌면서 조선인 학자들이 연구단체를 구성하고 맞춤법 통일안 제정 작업에 들어갔다.
조선어학회는 1930년 12월 13일 열린 총회에서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 것을 결의하고 최현배, 이희승 등 12인이 맞춤법제정위원이 되어 1932년 12월 원안을 작성했다. 이후 1933년 1월 4일까지 원안을 심의하여 수정안을 만들었다. 이어 같은 해 7월 25일부터 8월 3일까지 다시 독회를 거쳐 최종안을 마련해 그해 10월 19일 조선어학회 임시총회에서 이를 시행하기로 결의하고 10월 29일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공표했다. '한글맞춤법 통일안'은 총론 3항, 각론 7장 63항, 부록 2항으로 구성됐다. 총론은 제1항, 표준말은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하고, 제2항, 표준말은 현재 중류사회의 서울말로 하며, 제3항, 각 단어는 띄어 쓰되 토는 그 앞 단어에 붙여 쓴다는 내용이다.
오늘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한글맞춤법이 정비되기까지 실로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다.
1908년 8월 31일 주시경과 김정진 등이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했다. 1911년 9월 3일 '배달말글?음'으로, 1913년 3월 23일 '한글모'로 이름을 바꾸어 1917년까지 활동하다가 활동이 중단됐다. 이 단체는 1921년 12월 3일 한글 연구와 보급을 위해 '조선어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재건됐다. 10년 뒤인 1931년 1월 10일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고치고, 해방 후 1949년 9월 5일 '한글학회'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는 한글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인 1926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이라 정했는데, 이것이 한글날의 시초이다. 1928년 '가갸날'을 '한글날'로 고치고 음력으로 기념하여 오다가 1932년 양력으로 바꿔 10월 29일로 정했다. 그러다가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서문의 반포일 기록을 근거로 양력 10월 9일로 옮겼다. 해방되던 해 한글날이 10월 9일로 확정됐고, 1946년 정부는 한글 반포 500주년을 맞이하여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1927년 2월 10일 당시 조선어연구회는 기관지 '한글'을 창간했다. '한글'은 일제 당국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수차례 휴간됐다가 1946년 4월에 속간됐다. 한국전쟁으로 발행이 중단됐다가 1954년 4월 다시 발행에 들어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9년 10월 31일 제4회 한글날 기념식에 모인 유지 108명의 발기로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돼 사전 편찬이 시작됐다. 1939년 원고가 3분의 1가량 완성되어 총독부에 제출, 다음 해 대폭 수정한다는 조건으로 출판허가를 받았다. 1942년 봄 조판이 시작되고 가을에 원고가 모두 완성되어 교정에 들어갈 무렵 조선어학회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편찬이 중단됐다. 해방 후 사전 편찬사업이 재개돼 1947년과 1949년, 1950년 '조선말 큰사전' 1권부터 4권까지를 출판하고 한국전쟁 이후 1957년 6권으로 완간했다.
1941년 외래어와 외국 인명 및 지명에 관한 표기를 통일하기 위해 '외래어표기법통일안'을 발표했다. 해방 후에는 국어교육을 되살리기 위해 1945년 11월 '한글 첫걸음'을 시작으로 '초등국어교본,' '중등국어독본' 등의 교과서를 편찬했으며 대대적으로 한글강습회를 열었다. 1948년 '세종 중등국어 교사양성소'를 세워 국어교사를 양성했다.
조선어학회를 이야기할 때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는 1940년부터 각급 학교에서 우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했다. 특히 조선어학회를 주시해왔는데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이 어느 정도 결실을 보게 되자 일을 꾸몄다.
1942년 3월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영희의 일기장을 뒤져 국어(일본어) 사용 관련 내용을 트집 잡아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을 맡고 있던 정태진을 9월 5일 검거했다. 고문을 통해 조선어학회가 학술단체를 가장한 독립운동단체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내고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 1943년 4월까지 회원 33명을 잡아 28명을 감옥에 가두었다. 모진 고문과 수감생활로 이윤재, 한징 등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어학회는 강제 해산됐다가 해방 후 조직을 정비한 뒤 1949년 9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재결성됐다.
일본이 패전한 직후 1945년 9월 8일, 서울역 조선통운 운송부 창고의 산더미 같은 화물 틈에서 상자가 하나 발견됐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가 결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써내려갔던 '조선말 큰사전'의 원고였다. 무려 원고지 2만5천500장 분량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10년 넘게 작성했던 '조선말 큰사전' 원고가 일제 경찰에 증거물로 압수됐으며 재판 중 함흥에서 경성으로 실려 왔을 것으로 추정됐다. 해방되자 감옥에서 풀려난 학자들과 경성제대 학생들이 창고로 몰려와 화물 더미 속에서 애타게 찼던 그 원고였다.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원고를 찾은 이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사용하고 있는 한글. 이를 지켜내기 위해서 긴 세월 여러 사람이 피와 땀을 흘렸다. 그러나 오늘날 과연 한글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의문이다. 무심코 사용하는 신조어, 은어, 비속어들의 범람이 우리의 언어생활을 해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볼 문제이다. 외래어 오남용이 심각한 것은 물론이고 인터넷, 모바일 등에서 무절제하게 진행되고 있는 도를 넘은 언어파괴가 어느덧 일상적인 것으로 자리 잡아 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은 어떤 심정으로 단어 하나마다 맞춤법을 고르고, 한 장 한 장 공들여 사전을 꾸렸을까. 모진 고초를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나 몸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채 서울역 창고로 달려와 화물 더미를 뒤졌을 그들의 절박한 마음, 그리고 마침내 원고를 발견했을 때의 환호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좀 더 언어생활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