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그렇게 작은 일에 징징대면 드라마를 어떻게 만드니? 여기가 대학 동아리니? 드라마는 팀워크야. 우리 없으면 네 작품 하나 들어가기 힘들어. 드라마 그만 쓰고 싶어?"
누가 들으면 유치한 감정싸움이나 하는 줄 알겠다. 그러나 남성 PD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했던 여성 드라마 작가를 앉혀놓고 '업계 선배'라는 작자들이 하는 말이다. "가족 같은 사람들한테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같은 허튼소리가 오간다.
tvN 월화극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 등장한 에피소드다. 오랜 기간 동료로 호흡을 맞췄던 PD에게 겁탈당할 뻔했던 것도 모자라, '이런 일' 정도는 그냥 덮고 넘어가는 게 좋다며 무마를 시도하는 '남녀 불문 선배'들의 어이없는 강요가 이어진다.
할리우드가 요즘 거물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문 스캔들로 충격에 빠져있다. 피해자 중에 세계적 스타들이 많이 포함돼 있고, 그들이 하나둘 '커밍아웃'을 하면서 사건이 일파만파 커지고 있다. 이들 중 알리사 밀라노가 제안한 성폭력 고발 캠페인 '미투'(#Metoo)가 반향을 일으키고 있고, 와인스틴이 아닌 다른 영화계 관계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배우의 폭로도 나왔다.
세계적 여성 스타들이 신인 시절, 어린 시절 몹쓸 짓을 당했다는 뒤늦은 폭로는 성범죄가 권력의 문제임을 새삼 확인시킨다. 여배우들은 이구동성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고 토로했다.
성범죄는 피해자가 죄의식과 수치심을 느낀다는 점이 다른 범죄와 다르다. 피해자의 침묵 속 가해자가 계속해서 날뛸 수 있는 이유다. 성적으로 자유분방하다는 미국에서도 저런 일이 수십년간 벌어졌는데, 한국은 어떨까.
남성 부장 검사가 특종을 쫓아 술자리까지 취재온 여성 기자를 더듬고 강제로 키스까지 해놓고는 다음날 "술 취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한다. 여성 교수가 석사 논문 통과를 빌미로 남성 조교를 성폭행하려다가 들통나자 "제자에게 당할 뻔했다"며 사회적 통념(?)에 기대 남성 조교를 가해자로 둔갑시킨다.
둘 다 KBS 2TV 월화극 '마녀의 법정'에서 다룬 에피소드이고, 권력형 성범죄다. 이게 과연 '드라마 속 이야기'에 머물까.
과거 한 남자 배우의 여성 스태프 성폭행 미수가 수면 위로 드러날 뻔했다. 그러나 피해자가 수치심에 결국 '공개 고발'을 포기하면서 묻혀버렸다. 드라마가 아니다. 나의 일자리와 밥그릇, 승진과 미래를 쥔 권력자의 성범죄는 생각보다 넓게 퍼져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의 피해자는 변명하는 가해자에게 "넌 그냥 닥쳐. 감방에 처넣기 전에"라고 말했다. '마녀의 법정'의 여주인공은 성추행범 부장 검사에게 "(여자들) 그만 좀 만져"라고 소리쳤다. 싫다는데 왜 건드리나. 너무너무 싫다는데.
pretty@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