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경주의 남쪽에 우뚝 솟아 있는 남산(南山)은 금오봉(金鰲峰, 468m)과 고위봉(高位峰, 494m)을 중심으로 동서 4㎞, 남북 10㎞의 타원형으로, '불국토의 염원'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노천박물관'이다. 비록 산은 높지 않지만 예부터 '서라벌에는 절집이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는 말의 중심에 남산이 있다.
능선과 골짜기에는 절터 147곳, 불상 118기, 탑 96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이 남아 있다. 또 왕릉 13기, 산성 터 4곳 등 문화유적의 수가 모두 672개에 이른다. 국보 312호인 칠불암 마애불상군을 비롯해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용장사지 삼층석탑 등 보물급 문화재만도 13점이다. 경주 사람들이 "남산에 오르지 않고 경주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산에는 40여 개의 골짜기와 70여 개의 답사코스가 있다. 그 가운데 남산답사 1번지는 배동 여래삼존불에서 시작해 삼릉을 답사하고 난 뒤 삼릉계곡의 여러 불상을 둘러보고 금오봉 정상을 오른 후 용장사지를 살펴보고 용장골로 내려오는 코스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초기까지 신라 불상을 시대별로 만날 수 있는 이 코스는 5∼6시간 정도 걸린다.
◇ 경주 속살 보여주는 석불과 석탑
들머리는 남산 서쪽 자락의 삼불사(三佛寺) 주차장이다. 삼불사 옆에 있는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제63호)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미소를 품고 있다. 본존불 아미타불,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등 웃고 있는 모습은 다르지만 그 웃음은 한결같이 넉넉하고 편안하다. 아미타불은 '두려움을 없애주겠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원하는 바를 모두 들어주겠다'는 시여원인(施與願印)을 취하고 있다. 삼국시대 불상은 대개 이러한 수인을 하고 있는데 전쟁의 두려움을 막아주고 원하는 바를 이뤄주기를 바라는 신라인의 마음이 느껴진다.
1923년 주변에 묻혀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에 모아 세운 삼존불에서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와 숲길을 걷다 보면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쭉쭉 뻗어 있는 소나무와 이리 휘고 저리 굽은 소나무가 한데 어우러진 삼릉(사적 제219호) 솔숲이 감탄을 자아낸다. 소나무 사진작가 배병우의 남산 소나무 작품으로 유명한 솔숲 한가운데는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이 잠든 봉분이 솟아 있다. 능의 구조는 신덕왕릉이 1963년 도굴이 된 후 조사 과정에서 깬돌로 축조한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임이 확인됐다.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삼릉에서 개울을 따라 계곡을 오르다 보면 머리가 떨어져 나간 돌부처가 몸통만으로 결가부좌를 틀고 있다. 머리가 없는 석조여래좌상은 머리뿐만 아니라 손과 발마저 부서져 나갔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도 의연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땅속에 묻혀 있다가 1964년 발견되어 큰 바위에 걸터앉은 불상은 오랜 세월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아서였는지 마멸이 거의 없고 비단결 같은 질감을 느끼게 하는 옷 주름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불두가 떨어져 나간 돌부처의 목 위로 천공(天空)이 펼쳐진 듯 비어 있어 그 존재감이 더욱 뚜렷하다. 돌부처에서 왼쪽으로 조금 더 산길을 오르면 뾰족한 바위기둥에 돋을새김으로 모습을 드러낸 마애관음보살상(지방유형문화재 제19호)을 만나게 된다.
박택선 문화유산해설사는 "벼랑 바위에 부처를 새긴 마애불은 자연에 거스름 없이 신앙과 예술을 조화시킨 신라인의 영적 감성"이라면서 "광배를 따로 만들지 않고 뒤쪽의 비스듬한 바위를 광배 삼아 관음보살상을 조각해 방금 하늘에서 인간 세상으로 사뿐히 내려온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키 154㎝의 보살상 입술엔 연지를 바른 듯 붉은색이 감돈다. 붉은빛이 도는 부분에 입술을 새긴 석공의 예술감각에 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 신앙과 예술의 조화 '마애불'
발길을 돌려 다시 개울을 건너 산길을 더 오르면 넓은 바위에 선각(線刻)으로 새겨진 선각육존불(지방유형문화재 제21호)이 나온다. 높이 4m와 폭 7m 정도의 커다란 바위 면에는 석가모니 삼존불과 아미타 삼존불등 두 폭의 선각 그림이 새겨져 있다. 본존불 좌우 보살상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연꽃을 받쳐 들고 있다. 이렇듯현생과 내생을 보여주는 육존불은 전체가 선각으로만 처리된 특이한 조각기법으로 마치 불화를 보는 듯 회화적인 느낌을 준다. 흐린 날이나 비 오는 날엔 거친 선각이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바위 윗면에는 빗물이 불상으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물길을 파 놓았고, 목재를 결구(結構)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서라벌 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육존불에서 바윗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높이 10m 되는 바위벽에 새겨져 있는 석가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59호)이 반긴다. 이 여래좌상의 몸체는 선으로 그은 듯 새겨져 있고, 얼굴은 돋을새김으로 표현했다. 남산의 마애불 중 가장 늦은 시기인 고려 초기 10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여래좌상 옆의 바위는 부부가 안고 있는 모습 같아 '부부바위'라 불린다.
이 여래좌상에서 좁은 산길을 120m쯤 내려가면 화려한 연화대좌 위에 앉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66호)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석굴암 본존불상처럼 균형 잡힌 몸매와 당당한 자세를 지닌 이 여래좌상은 코 밑에서 턱까지 완전히 파손된 채로 방치돼 있다가 2009년 얼굴 부분과 연화대좌 뒤의 광배를 복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래좌상을 지키던 삼층석탑은 일제강점기에 지상으로 이전됐다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작은 기단만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개울을 건너 산길을 조금 오르다 개울 건너편을 바라보면 30m의 바위 절벽 면에 얼굴 부분만 새겨진 선각마애불이 눈에 띈다. 마치 바위 속에 숨어 있던 부처님이 탐방객들에게 살며시 그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마애불을 뒤로 하고, 가파른 산길을 400m가량 오르면 상선암에 닿는다.
이곳에서 오른쪽 벼랑으로 150m쯤 올라가면 거대한 바위벽에 6m 높이로 새긴 마애석가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58호)을 만날 수 있는데, 몇 년 전부터 낙석 위험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신선들이 내려와 바둑을두었다는 바둑바위를 지나 상사바위의 전망 포인트에서 내려다보아야 한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부처님이 반쯤 뜬눈으로 서라벌 들판과 기도하는 중생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하다.
마애불은 지금도 천 년 영화를 꿈꾸고 있는 것일까. 산 아래 자락에 펼쳐진 황금 들녘은 바람에 몸을 맡길 뿐 말이 없다.
상사바위는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나 아기를 원하는 사람이 찾아와 치성을 드리면 그 소원을 들어주던 바위로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숭배되었던 토속신앙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1856년 새긴 '産神當'(산신당)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곳에서 아이 낳기를 기도하면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능선 길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하면 금오봉 정상에 이른다. 남산의 최고봉은 고위봉이지만 중심이 되는 봉우리는 금오봉이다. 그래서 남산을 금오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곳은 냉골, 포석계, 지바위골, 비파골, 약수골 등의 분수령이 된다.
◇ 남산 답사의 '절정' 용장사지 삼층석탑
금오봉 정상을 찍고 남산 계곡 중에 가장 깊고 큰 계곡인 용장골로 내려가면 매월당 김시습이 세속을 버리고 은둔하며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집필한 곳으로 알려진 용장사지다. 가파르기 그지없는 바위 절벽에 기묘하게 터를 잡았던 용장사는 흔적도 없고 그 빈터에는 삼층석탑과 삼륜대좌불, 마애불만이 남아 있다.
산 중턱에 우뚝 솟은 삼층석탑(보물 제186호)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으로 거대한 바위산 전체를 하층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이층기단을 쌓은 뒤 삼층의 탑신과 옥계석을 얹어 놓았다. 4.5m의 석탑 바로 아래는 아찔한 절벽이고 깊은 계곡이다. 마치 수미산 꼭대기에 탑을 세운 듯한데, 계곡 아래서 보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남산 답사의 감흥이 절정에 달한다.
석탑이 하늘로 오르고자 했던 신라인의 마음이라면 그 아래쪽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87호)은 하늘의 부처님이 땅 위로 내려오는 모습이다. 원반 모양의 세 돌받침(삼륜대좌)에 머리가 없는 좌불이 얹혀 있는 형상이 인상적이다. 유가종(瑜伽宗)의 시조인 대현(大賢)스님이 기도하면서 불상 주변을 돌면 불상 또한 고개를 돌렸다고 전해진다.
몸체만 남아 있는 삼륜대좌불의 왼쪽 바위벽에는 8세기 중엽의 사실주의 불상의 형태를 보여주는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이 연꽃 위에 앉아 있다. 여래상은 용장골 너머의 들녘을 관망하고 있는데 양어깨에서 가지런하게 흘러내린 옷자락은 속이 다 비칠 것 같은 얇은 느낌으로 촘촘히 주름져 있다.
삼륜대좌불과 마애여래좌상을 지나면 자연 암반의 석등대석과 김시습의 발자취가 서린 용장사 법당 터를 만난다. 석등대석 지점에서 올려다보면 하늘을 받치고 서 있는 듯한 삼층석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숲과 솔숲을 따라 하산하다 설잠교를 지나 만나는 반석에서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다. 삼층석탑이 까마득히 보인다. 노약자 등 거동이 불편했던 천 년 전 신라인들이 이곳에서 석탑을 바라보며 합장하던 모습을 떠올려 본다.
하룻길 여정이 짧았던 것일까. 남산을 내려오는 길, 석양은 붉게 물들어 대지를 채우고 발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돌부처들이 머물다 가라고 손짓하는 듯 마음은 쉬 남산을 떠나지 못한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주 고개를 들어 뒤돌아보게 하는…. 남산은 그랬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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