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가<라트비아>=연합뉴스) 김용윤 기자 = 라트비아는 독일·스웨덴·러시아 등 강대국들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설움을 당하다가 1918년 제정 러시아로부터 독립한다. 소비에트 강점으로 1940년 다시 압제에 시달렸고 1991년 소련 붕괴와 동시에 서방에 편입됐다. 내년은 독립 100주년이다. 남한 3분의 2 크기에 전 국토의 절반이 숲으로 덮여 있다. 인구 200만 명이 채 안 되는 수난과 질곡의 땅에도 최근 들어 한국인의 발길이 잦아졌다.
모든 길이 로마로 열려 있듯 라트비아 수도 리가(Riga)에 이르는 길은 사방으로 열려 있다. 핀란드 헬싱키를 경유하는 항공편을 이용하거나 스웨덴 스톡홀름을 오가는 페리 '탈링크'를 타면 리가에 닿을 수 있다. 장거리 버스나 기차, 자동차로도 러시아의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우크라이나 키예프, 벨라루스 민스크, 에스토니아 탈린, 리투아니아 빌뉴스 등에서 리가로 들어갈 수 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독일 북부 뤼베크를 자유교역이 가능한 도시로 선포한 1226년 이후 발트해에서는 목재, 광물, 모피, 직물, 호박 같은 보석류, 밀랍, 생선 등 온갖 물산이 활발하게 이동했다. 리가는 바로 발트해 무역의 중심지였다.
◇ 무역상이 남긴 리가의 랜드마크
발트 3국, 특히 라트비아 여행의 핵심은 리가다. 천혜의 항만을 갖춘 리가는 유럽 평원을 흘러온 다우가바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다. 인구 65만 명 안팎에 불과한 리가 구시가지를 둘러보는 데는 그리 많은 날이 필요하지 않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얼마든지 체류하면서 즐길 수 있겠지만 대체로 이틀 정도면 무난하다. 리가 여행안내책자 '인유어포켓'도 48시간 올트타운 투어를 소개한다.
리가, 특히 중세 유럽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올드타운을 둘러보려면 어느 곳에서 출발해도 좋다. 일단 도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검은 머리 전당'에서 출발한다. 광장을 중심으로 시청을 마주하고 있는 검은 머리 전당은 1334년 지어진 길드조합 건물이다. 아프리카, 남미를 대상으로 무역했던 미혼 상인들이 숙소 겸 연회장소로 이용했다. '검은 머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상인들의 수호성인이 흑인 '성 모리셔스'였던 데서 비롯한다.
검은 머리 전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폭격으로 거의 파괴되고 소련이 이마저 철거해 사라졌다가 2001년 도시 건설 800주년을 기념해 복원됐다. 올해 연말까지는 보수작업이 진행 중이어서 실물과 맞닥뜨릴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광장을 빠져나오면 성베드로성당이다. 복음루터교회가 관할하는 이 성당은 1209년 처음 지을 당시 목재를 썼지만 이후 증축하면서 돌을 사용했다. '베드로의 수탉'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첨탑은 높이 123.5m로 구시가지에서 가장 높은 건축구조물이다. 과거 이보다 높은 건축물을 지을 수 없었으므로 72m 높이에 있는 전망대는 리가 구시가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유일한 포인트다.
대부분 첨탑 전망대가 좁은 돌계단을 숨 가쁘게 올라야 닿지만 이곳은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다. 전망대에서는 강 건너 세모꼴로 웅장하게 서 있는 라트비아국립도서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제국의 제플린비행선 격납고를 활용해 개설한 리가의 또 다른 랜드마크인 중앙시장을 볼 수 있다.
라트비아 국토 대부분이 평원이어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해야 해발 300m 안팎에 불과해 시가지 전체를 한눈에 보고 싶다면 반드시 올라가야 할 곳이다.
성당 뒤꼍에는 그림 형제의 동화 속 주인공인 당나귀와 개, 고양이, 수탉으로 구성된 '브레멘음악대'가 서 있다. 관광객들의 숱한 손길로 콧잔등이 반질반질하다. 독일 가톨릭교회 브레멘교구장 알베르트 폰 북스회프덴 대주교가 1201년 북방 십자군 '리보니아 기사단'을 이끌고 다우가바강에 인접한 땅에 도시를 건설한 것을 기념해 브레멘시가 기증했다고 한다.
주교좌 성당이었으나 세월이 흘러 복음루터교회 예배당이 된 리가대성당은 800여 년 전 지어진 건축물이다. 벽 두께 2m에 폭 47m, 길이 187m에 달하는 발틱 최대 규모다. 초기 고딕양식을 기반으로 바실리카양식이 혼합되고 바로코 양식의 첨탑이 있는 성당은 파이프 6천768개로 구성된 엄청난 규모의 파이프오르간을 보유하고 있어 수시로 연주회도 열린다. 유럽 전역을 무대로 명작을 남긴 헝가리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이 파이프오르간 연주용 작품을 쓰기도 했다.
◇ 라트비아인의 자존심 '자유의 여신상'
돔 광장은 올드 타운의 중심이다. 박물관으로 쓰이는 옛 증권거래소 건물과 라트비아 국영라디오가 성당 맞은편에 나란히 배치돼 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2014년 유럽연합(EU) 문화수도로 지정된 구시가지는 울퉁불퉁한 좁은 돌길로 이어진다. 구두나 힐을 신고 걷는 것은 어리석은 일 일지도 모른다. 걷다 보면 리부광장이다. 광장 한쪽으로 길드 건물이 나란히 서 있다. 상인들의 공동체인 대길드와 도시장인들의 이익단체였던 소길드 건물인데, 대부분 관광객의 관심은 지붕 위의 '검은 고양이'로 쏠린다.
독일계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길드에서 활동하려다 좌절되자 분통이 터진 라트비아계 상인이 길 건너편에 저택을 짓고 원뿔형 지붕 꼭대기에 고양이를 만들어 올려놓았다. 그것도 엉덩이를 길드 쪽으로 내밀고 등을 활처럼 휜 모양이었다. 보기 좋게 한 방 먹인 셈이었다. '엉덩이를 다른 쪽으로 치워달라'는 소송 끝에 화해가 이뤄져 고양이는 길드 쪽을 바라보게 됐고, 집주인은 길드 회원이 됐다.
검은 고양이를 뒤로하고 몇 블록 더 올라가면 라트비아인들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의 여신상'(Freedom Monument)을 만난다. 1935년 국민 성금으로 건립된 여신상은 러시아 표트르 1세 동상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조각가 카를리스 잘레의 작품으로 라트비아 고대신화에 등장하는 여신 '밀다'가 행정구역을 상징하는 세 개의 별을 들고 서 있고 하단부에는 라트비아 민족 대서사시 '라츠플레시스'에 나오는 내용이 조각돼 있다. 라트비아 소비에트공화국 시절 레닌 동상도 있었지만 철거됐다.
1989년 탈린과 리가, 빌뉴스로 이어지는 발트 3국 시민 200만 명이 만든 '발틱의 길'을 따라 늘어선 620㎞에 달하는 인간사슬도 이 여신상 발밑을 지났다. 총 대신 노래, 사람과 사람이 잇는 띠로 독립을 갈구한 라트비아인들에게 여신 '밀다'는 그만큼 소중하다.
◇ 한석규 주연 '베를린' 촬영된 골목
트램 궤도를 따라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1330년 스웨덴 점령 시기에 지어진 두께 2m가량의 육중한 화약탑과 17세기 병사들의 막사로 썼던 노란색 건축물이 나온다. 카페 등으로 용도 변경돼 활용되고 있고 스웨덴이 라트비아를 지배했을 때 조성한 '스웨덴문'도 볼 만하다.
골목만 조금 벗어나면 새로운 볼거리들이 등장하는 바람에 눈이 즐겁다. 한석규, 하정우 등이 출연한 영화 '베를린'은 리가의 골목을 담았다. 가까운 곳에 라트비아의회가 있고 의회 앞에서는 바리케이드 기념비를 만난다.
가톨릭교회 성야고보성당 부지에 조성된 삼각뿔 모양의 기념비는 1991년 1월 민주화를 외치던 라트비아 민중들이 바리케이드로 저항하며 소련특수부대원들에 맞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다.
의회와 바리케이드 기념비 사이로 난 길을 타고 가다 성당을 끼고 왼쪽으로 돌면 유명한 '삼형제 건물'이 나타난다. 리가 석조건물 중 가장 오래됐다. 15세기에 지어진 '맏형' 빵 가게 건물에서 18세기 작품까지 100년이 넘는 터울이다.
여기서 두세 블록 더 가면 14세기에 세워진 리가 성이다. 다우가바강 둔치에 있는 성은 리보니아 기사단의 방어용 요새였지만 스웨덴과 러시아 치하에서 총독관저로 사용됐다. 지금은 대통령 관저다.
자유의 여신상을 벗어나 위치한 '코너 하우스'도 라트비아 현대사에 가장 중요한 건물 중 하나다. 소련 시절 악명 높았던 국가보안위원회(KGB) 지부였던 이 건물 지하는 감옥으로 활용돼 온갖 고문이 자행됐다. 소련은 당시 주민 17만여 명을 시베리아 등지로 강제추방했다.
◇ 내년 6월 독립 100주년 기념 하모니 축제
라트비아에 간다면 발트 최고의 해변휴양도시인 유르말라를 방문하면 좋다. 아름다운 석영 모래가 26㎞가량 펼쳐진 유르말라 해변은 리가에서 차로 20분이면 닿는다. 사계절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강재규 감독의 영화 '마이웨이'는 라트비아 해변에서 촬영한 노르망디 해전의 한 장면을 넣기도 했다.
라트비아는 축제가 끊이지 않는다. 특히 6월 초 열리는 '리가 오페라 페스티벌'과 해가 가장 긴 날인 '하지'를 장식하는 '하지축제'는 새해맞이 행사를 압도한다. 주민들은 들꽃 등으로 만든 화관을 쓰고 치즈와 맥주를 먹으며 밤새도록 가무를 즐긴다.
1873년 시작돼 5년 주기로 열리는 '송 앤드 댄스 페스티벌'도 내년 6월 개최된다. 라트비아 주권회복 100주년을 맞는 내년의 이벤트는 특히 리가 야외극장에 수만 명이 모여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엄한 하모니로 펼칠 예정이라고 한다. 이런 모습은 라트비아인들이 온갖 수난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형질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yy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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