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연합뉴스) 김진방 특파원 = 시진핑(習近平) 집권 2기의 중국 경제외교 사령탑의 한 축을 담당할 왕양(汪洋·62) 상무위원은 시 주석이 가장 신임하는 '경제 책사'로 통한다.
안후이(安徽) 성 쑤저우(蘇州) 시 출신인 왕양은 시 주석이 다소 경원시하는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의 퇀파이((團派)로 분류되지만, 시진핑 1기 동안 중요 직책을 맡으며 중용됐다.
또 시 주석의 집권 후 첫 해외 순방을 수행하는 가하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도 항상 시 주석의 옆자리에 배석하는 등 '총애'를 받았다.
왕양은 요직에 진출한 이후 특별한 굴곡 없이 승승장구를 해왔다.
공청단 출신이지만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 주석 전 주석의 고향인 안후이 성 공청단에서 20대 초반에 5년간 활동한 것이 전부여서 계파성이 짙지 않은 것도 상무위원 발탁의 배경이 됐다.
왕양은 44세였던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 시기에 국가발전계획위원회 부주임을 지냈으며,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시기에도 국무원 부비서장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50세에 충칭(重慶) 시 서기, 52세 광둥(廣東) 성 서기를 거치며 중앙 정치무대에 진출한 지 6년 만에 주요 직책을 맡아 일찌감치 최고지도부 후보자로 거론됐다.
2007년 17기 1중전회에서는 상무위원 후보로 급부상했으나 당내 계파 간 싸움의 희생양이 돼 정치국 위원에 선임되는 데 그쳤다.
2012년 시진핑 1기 지도부 인선에서도 리커창(李克强) 총리를 보좌하는 부총리 중 서열 3위 자리에 임명되며 상무위원 진입이 무산됐다.
그러나 왕양은 국무원에서 뛰어난 행정능력을 보여주며 시 주석의 신임을 받는 데 성공했다.
왕양은 농업·수리·홍수가뭄 방지·상무·관광·대외무역 등 주요 분야를 담당했고, 국무원 탈빈곤개발영도소조 조장을 맡아 시 주석이 가장 강조하는 탈빈곤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광둥성 서기 재직 당시에는 시 주석이 2002년 저장(浙江) 성 서기 시절 제시한 '등롱환조'(騰籠換鳥·설비기술의 농촌 이전을 통해 새로운 첨단산업을 육성하는 산업구조 고도화 전략) 정책을 도입해 가공산업 지대인 주장(珠江) 삼각주 지역을 첨단 IT산업 지대로 변신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왕양은 시 주석의 최대 정적으로 꼽히던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서기와 공개 설전을 벌인 일화로도 유명하다.
보시라이가 충칭에서 혁명가요 제창과 함께 좌파 노선을 부르짖는 '홍색 캠페인'을 벌이자 왕양은 "위기의식을 키우는 것이 노래를 부르는 일보다 훨씬 공산당 장기집권에 유리하다"고 반박하며 설전을 벌였다.
왕양은 중국에서 가장 무역 업무에 정통하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시 주석은 지난 7월 미중 정상회담 이후 처음 개최된 미중 경제대화의 중국 대표단 단장을 왕양에게 맡길 정도로 경제외교 분야에서 그를 신임했다. 또 대외협상 창구를 왕양으로 일원화하기도 했다.
미중간 무역전쟁설까지 거론되는 상황에서 왕양은 미국과의 통상 마찰에 대응할 적임자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내년 3월 열릴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통해 상무위원단의 업무 분장을 공식 발표할 것으로 예상되나, 왕양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주요 경력.
▲1983년 공청단 안후이성위원회 부서기 ▲1993년 안후이성 부성장 ▲1999년 국가발전계획위원회 부주임 ▲2003년 국무원 부비서장 ▲2005년 충칭시 서기 ▲2007년 광둥성 서기 ▲2013 국무원 부총리
chinakim@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