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학교와 다름없는 공간 지으려 애써…지역사회 좋은 자산 돼"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우레탄 깔린 녹색 운동장에 아이들의 웃음이 한바탕 쏟아졌다. 교사들은 자꾸만 제 자리를 벗어나려는 아이들을 카메라 앞에 고정하느라 진땀을 뺐다.
밀알학교 졸업사진 촬영 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원로 건축가 유걸(77)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서울 강남구 일원동 아파트 숲에 자리한 밀알학교는 20년 전 문을 연 특수학교다. 남서울은혜교회가 예배당 대신 장애아 교육 공간을 짓기로 하면서 탄생한 학교로, 유 건축가가 설계를 맡았다.
서울 강서지역 특수학교 설립 문제가 최근 뜨거운 감자가 되면서 올해로 개교 20년을 맞은 밀알학교도 덩달아 주목받았다. 체육관, 미술관, 공연장 등을 동네 주민과 공유하는 밀알학교는 특수학교가 지역사회와 융화한 모범적인 사례로 꼽힌다.
"밀알학교도 설계 당시부터 주민 반대가 굉장히 거셌습니다. 주민이 반대하니 강남구청에서 허가 인증을 해주지 않으려 했어요. 시공사가 현장에 갖다놓은 중장비 한 대가 부서진 적도 있었죠."
24일 건축물개방축제인 '오픈하우스서울' 계기로 밀알학교에서 만난 유 건축가는 "밀알학교를 지을 때도 아주 살벌했다"고 회상했다. 밀알학교 건립 문제는 결국 법정으로 향한 뒤에야 해결됐다.
2~3개월 지연된 끝에 큰 고개는 넘었지만, 한정된 대지와 예산으로 특수학교를 짓는 일도 녹록지 않았다. 자폐아를 비롯한 발달 장애아들의 특성을 고려하면서도 특수학교라는 정체성을 지나치게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고민 끝에 탄생한 공간이 1층부터 4층까지 뚫린 거대한 아트리움을 중심으로 한 본관이다. 4층 높이 유리로 마감한 한쪽 벽면과 폴리카보네이트로 된 반투명 지붕은 외부의 공기와 빛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인다. 실내에서도 유리 밖 낮은 구릉과 녹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아트리움은 밀알학교에서 일종의 마당인 셈이다.
"아이들에게 제일 좋은 것은 종소리가 들리면 뛰어나올 마당이 있는 공간이죠. 우리나라 학교 건축을 보면 그래서 정말 마음이 아파요. 좁은 복도에 교실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기만 하죠."
유 건축가는 1층부터 4층까지 연결되는 계단에도 공을 들였다. 철골계단을 서로 엇갈리게 해서 "한 층씩 올라가는 기분이 매번 달라지면서 4층까지 간다는 생각 없이 쉽게 갈 수 있도록" 설계했다. 4층까지 지그재그로 연결되는 경사로인 램프(Ramp)도 마찬가지다.
매끈한 최신식 건물들에 익숙한 눈으로 밀알학교를 살펴보면 투박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유 건축가도 "교회에 기부한 분 중에도 마감이 안 된 것 같다면서 불만을 나타낸 분들도 있었다고 들었다"면서 껄껄 웃었다. 그러나 밀알학교는 경제적 제약(2002년까지 계속된 3개 동 건립에 120억 원이 투입됐다. 평당 건축비는 300만 원에 못 미친다)과 지금보다 한참 뒤떨어진 기술 수준 속에서 분투한 결과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본관과 분리된 듯하면서도 이어지는 별관은 체육관, 공연장, 카페, 미술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주말마다 교회 예배당으로 쓰인다는 체육관에서는 아이들이 운동 중이었다. 아래층 밀알미술관에서는 중년 여성들이 수십 점의 도자기 전시에 여념이 없었다.
이 중 지역주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공간은 공연장이다.
중국의 제일 가는 도자 생산지인 징더전(景德鎭) 출신의 유명 도예가 주러겅(朱樂耕)이 교회로부터 흙만 받아 안팎을 장식한 웅장한 도자 벽화가 시선을 잡아끈다. 수천 송이 꽃이 만개한 듯한 도자 벽화는 유 건축가가 이곳을 올 때마다 한 번씩 들여다보는 명작이다. 홀 내부 작품들은 난반사로 근사한 음향을 만들어내,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이 공연을 자청한다.
"지역주민에게 분기에 한 번씩 무료 음악회를 진행하는데 가족 단위로 많이 온다"는 밀알학교 행정실장의 설명에 유 건축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역사회의 굉장히 좋은 자산이 됐다"라면서 만족감을 표했다.
이밖에 유치원실, 통합감각실, 체력단련실, 구내식당 등을 꼼꼼히 둘러본 그는 아쉬운 점이 없느냐는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쓰는 분이 마음 편히, 구석구석 잘 쓰면 그것이야말로 제일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유 건축가는 이번 강서지역 특수학교 설립 논란을 보면서 "20년이 지나도 똑같다"는 생각과 함께 무척 마음이 아팠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좋은 장애인 특수학교가 있는 일이 자랑스러운 일만은 아니다"라는 뜻밖의 말을 했다. 이어진 설명을 듣고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특수학교 설계가 처음이다 보니 외국에서 시범 케이스가 될만한 곳이 있나 하고 찾아봤죠. 그런데 미국은 통합교육을 하기에 일반 학교에서 다 같이 교육하고, 일본도 일반 학교에서 한 반에 1, 2명씩 받아들여서 함께 공부하더라고요. 비용은 훨씬 많이 들겠지만, 우리도 장애아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통합교육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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