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그러므로 우리 조정(朝廷)에서도 박문국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어, 외보(外報)를 폭넓게 번역하고, 아울러 내사(內事)까지 기재하여 국중(國中)에 알리는 동시에 열국(列國)에까지 반포(頒布)하기로 하고, 이름을 순보(旬報)라 하여 문견(聞見)을 넓히고, 여러 가지 의문점을 풀어주며, 상리(商利)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으니, 중국ㆍ서양의 관보(官報)ㆍ신보(申報)를 우편으로 교신하는 것도 그런 뜻에서이다. 세계 속의 방위(方位)ㆍ진침(鎭浸)ㆍ정령(政令)ㆍ법도(法度)ㆍ부고(府庫)ㆍ기계(器械)ㆍ빈부(貧富)ㆍ기아(飢餓)에서 인품(人品)의 선악(善惡), 물가(物價)의 고저(高低)까지를 사실대로 정확히 실어 밝게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이 사이에 포폄권징(褒貶勸懲)의 뜻도 들어있다. 그러나 독자들이 멀리 있는 것을 외면하고 가까이 있는 것만 좋아한다면, 휩쓸려 걷다가 자기 걸음걸이마저 잃어버리는 격이 될 것이고, 새것에는 어둡고 옛것만 고집한다면, 우물에 앉아서 제 것만 크다고 하는 격이 될 것이니, 반드시 때와 형세를 살펴 무작정 남만 따르거나 자기 것만 고집하지 말고, 취사(取捨)와 가부(可否)를 반드시 도(道)에 맞도록 하고 정도를 잃지 않은 뒤에야 거의 개국(開局)한 본래의 뜻에 맞을 것이다."
1883년 10월 31일(음력 10월 1일) 발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 한성순보의 창간사 '순보서(旬報序)'의 일부로, 신문 발간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
신문의 날은 4월 7일이다. 이날은 독립신문의 창간 기념일이다. 1896년부터 1899년까지 독립협회가 발행한 독립신문은 최초의 근대적 일간지이며, 최초의 민간 신문이며, 최초의 한글 신문이다. 독립신문의 창간일을 신문의 날로 삼은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보다 13년 앞서 만들어진 한성순보 역시 우리 언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관보의 성격을 가졌으며, 열흘에 한 번 나왔고, 순 한문으로 만들어졌으나 처음으로 신문을 발행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다. 그것도 당시 개화운동의 구체적인 결실로, 국민계몽을 위한 것이었다.
한성순보는 외교통상문제를 관장하던 통리아문(統理衙門) 내 박문국(博文局)에서 월 3회 발행됐다.
1882년 9월 박영효는 임오군란의 수습을 협의하기 위한 특명 전권 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약 3개월간 머물렀다. 체류 기간 일본의 발전상을 살펴보면서 국민계몽을 위한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신문제작을 도울 일본인 기자 3명과 인쇄공을 데리고 1883년 1월 6일 서울로 돌아왔다. 귀국 후 한성부판윤(서울시장)에 임명된 박영효는 고종에게 신문 발간을 진언해 그해 2월 28일 고종으로부터 한성부에서 신문을 간행하라는 명을 받았다.
신문 발간 준비에 착수한 박영효는 실무 작업을 유길준에게 맡겼다. 그러나 4월 10일 박영효가 갑자기 경기도 광주 유수로 좌천돼 한성부판윤 자리에서 물러나자 유길준도 손을 뗐고, 이렇게 되자 신문 발간 업무는 통리아문으로 이관됐다.
4개월 후인 8월 17일 통리아문의 한 부서였던 동문학(同文學)의 부속기구로 박문국이 설치되어 신문 발행을 전담하게 됐다. 박문국에서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해 10월 31일 한성순보 창간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세창, 장박, 김기준 등이 주사, 또는 사사로 임명됐는데 이들이 오늘날의 신문기자들이다.
한성순보는 크기가 가로 19㎝, 세로 25㎝였고, 20면 정도로 발행됐다.
기사는 내국 기사와 각국 근사(외신)로 나누어졌다. 내국 기사로는 관보, 사보(사회면 기사), 시직탐보(물가정보), 잡록(논문 또는 피처 기사), 본국 고백(사고)을 실었으며, 각국 근사로는 국제정세, 전쟁이나 분쟁, 근대적인 군사장비나 국방정책, 개화문물, 선진 외국의 정치, 문화, 제도, 역사, 과학, 지리 등을 소개했다. 1면은 승정원에서 조정의 소식을 관리들에게 전하는 필사신문 '조보(朝報)'를 옮겼으며, 각국 근사는 '신보(申報),' '중외신보(中外新報),' '순환보(循環報)' 등 주로 중국 신문의 기사를 번역, 전재했다. '시사신보(時事新報),' '도쿄일일신보(東京日日新報)' 등 일본 신문과 다른 국가의 신문 기사도 번역하여 실었다.
한성순보는 중국에 얽매이지 않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히게 하려고 지구과학과 천문학을 소개했다. 창간호에 일러스트레이션 '지구전도'와 지구는 둥글다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논설 '지구론'을 실었다. 서구 문명을 알리는데 적극적이었지만 한성순보의 기조는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을 유지하면서 서양의 기술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이루자는 '동도서기론'이었다.
관보 성격의 한성순보의 독자는 주로 관리들이었다. 관아에 배포하여 관리들이 읽게 했으며 각 관아에서는 신문 대금을 박문국에 납부했다. 일반인과 외국인들도 읽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퍼지지는 못했다.
한성순보는 1884년 12월 갑신정변 당시 박문국 사옥과 활자, 인쇄시설 등이 모두 불에 타버려 창간 1년 만에 폐간됐다. 그러나 상하 관민이 모두 신문의 복간을 바랐기 때문에 박문국을 중건하여 1886년 1월 25일 한성주보로 제호를 바꿔 다시 발간됐다. 두 신문은 제호는 달라도 별개의 신문이 아니었다. 모두 박문국에서 발행됐고 발행 목적도 같았다. 열흘에 한 번 발행되던 '순보'의 발행주기가 일주일에 한 번으로 단축됐기 때문에 '주보'로 바꾸었을 뿐이다.
갑신정변 당시 폐간된 것으로 본다면 한성순보는 제41호까지 발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창간호부터 제36호(1884년 10월 9일 자)까지만 보존되어 있다.
한성주보는 최초의 주간 신문으로, 가로 16.5㎝, 세로 22.5㎝ 크기에 16면 또는 18면씩 발행됐다. 한성주보는 최초로 국한문을 혼용했고, 내용에 따라 한글만 또는 한문만 쓰기도 했다. 그러나 창간 이듬해 제47호부터는 한글 기사가 모두 없어지고 한문으로만 제작됐다. 아무래도 독자들은 아직 한문이 편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성주보는 일주일 단위로 발행돼 한성순보보다 속보성이 강화됐고, 외국 기사를 줄이고 국내 기사와 의견기사의 비중이 늘었다. 독일과 일본 회사의 광고, 한약방 동수관의 광고 등 세 건에 불과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신문에 광고가 실린 것은 특기할 만하다.
한성주보는 1888년 7월 7일 경영난으로 박문국이 폐지됨에 따라 폐간됐다. 정확하게 몇 호까지 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23호 정도 발행됐을 것으로 추정되나 남아있는 신문은 41호에 불과하다.
한성순보가 세상에 나온 지 134년이 됐다. 그동안 우리 신문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어냈다.
1896년 4월 7일에는 최초의 민간 신문 독립신문이 창간됐다. 서재필의 주도로 정부와 개화파의 지원을 받아 만든 이 신문은 한글 전용이었으며 영문으로도 기사를 작성했다. 총 4면으로 이루어져 3면까지는 국문판, 마지막 4면은 영문판으로 편집했다. 독립신문의 영향으로 1898년 황성신문과 제국신문 등의 일간지가 나왔고, 1904년에는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1920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의 3개 민간지가 발행을 시작했다. 시사신문은 이듬해 폐간되고 1924년 시대일보가 창간됐다. 일제는 3.1운동 후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민간지 발간을 허용했으나 실상은 철저한 검열로 언론활동이 자유롭지 않았다.
2016년 12월 31일 현재 전국적으로 일반 일간지 400개, 기타 일간지 372개, 인터넷신문 6천84개가 문화체육관광부에 정기간행물로 등록돼있다.
한성순보의 발간은 근대적 언론시대로 들어가는 기점이 됐다. 비록 1년이라는 짧은 기간 지속했으나 이 신문은 개화운동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으로서 서구의 개화문물과 지식을 소개하고 세계관을 넓혔으며 국민의식과 외세에 대한 경계의식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터넷과 모바일의 발달로 종이신문의 활용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오늘날, 신문을 만들며 국민계몽을 통해 나라의 개화와 부국강병을 꿈꾸었을 개화기 선각들의 자취를 기억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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