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의 보은·'관시(關係)' 인사…부각되는 량자허 하방 인연

입력 2017-10-27 13:56  

시진핑의 보은·'관시(關係)' 인사…부각되는 량자허 하방 인연

시진핑 인맥 어떻게 형성됐나…과거 인연에서 능력·충성심 중시




(상하이=연합뉴스) 정주호 특파원 = 중국의 새 지도부 선출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과거 하방(下放·지식인을 노동 현장으로 보냄) 생활과 관련된 연줄이 유독 눈에 띈다.

시 주석은 청소년기에 겪은 하방생활의 충격과 경험을 기층 농민들과 동고동락하며 미래 지도자로서 포부와 계획을 설계한 기간으로 삼아 향후 '30년 지도자'로서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물러나는 왕치산(王岐山) 서기와의 하방 인연은 둘째치고 차기 지도부 인사 곳곳에 1969∼1975년 하방된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시 량자허(梁家河)촌에서 맺은 인연들이 묻어있다.

이번에 정치국원으로 발탁된 왕전(王晨·67)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도 하방 생활 중이던 시 주석의 칭화(淸華)대 입학을 도왔던 이로 알려져 있다.

시 주석이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반동분자 가족으로 몰려 박해를 받으며 사실상 대입 추천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는데 왕전이 당시 시 주석의 칭화대 입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입학을 성사시켰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시 주석에게 '베이징 형'이라고 불린 왕전은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지구 당위원회 판공실 직원으로 일하면서 시진핑의 대입 추천 자격을 얻어줬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 주석은 회고록에서 "나같은 가정배경을 가진 사람은 당시에 합격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 칭화대는 옌안지구에 단 2명만 배정했는데 전부 옌촨현으로 돌려졌는데 3개 지망을 모두 칭화대로 써냈다"고 전한 바 있다.

시 주석의 배짱과 왕전의 실무 지원으로 1975년 시 주석은 칭화대 화학공정과에 합격했다.

이후 왕전은 1995년 광명(光明)일보 총편집에 이어 2000년 중앙선전부 부부장으로, 2008년 국무원 신문판공실 주임, 2013년 전인대 부위원장 겸 비서장으로 옮겼고 시 주석이 집권한 2015년 7월 전인대 상무위원회 당조서기를 맡았다.

시진핑 1기의 반부패 사령탑으로 실세였던 왕치산 서기도 시 주석과 량자허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 시 주석이 베이징에서 량자허촌으로 돌아가던 길에 펑좡(馮庄)촌에서 지식청년 생활을 하던 왕치산의 숙소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잔 적이 있었다.

시 주석의 량자허 연줄은 새 지도부로도 이어진다.

정치국에 입성한 리시(李希·61) 랴오닝성 서기는 2006∼2011년 옌안(延安)시 서기를 지낼 당시 '깡촌'이었던 량자허촌의 관광지 개발에 앞장선 인물이다. 량자허촌에 하방 기념관을 만들었던 기반이 리 서기에서 시작됐다.

리 서기는 시 주석의 부친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와도 연결이 된다. 시중쉰이 혁명활동을 시작한 간쑤(甘肅)성 룽난(롱<좌부변龍>南)시 량당(兩當)현에서 태어나 시중쉰의 동료인 리쯔치(李子奇) 간쑤성 서기의 비서를 지낸 경력이 있다.

이처럼 대를 이은 인연은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신임 서기가 될 자오러지(趙樂際) 중앙조직부장에게도 적용된다. 조부인 자오서우산(趙壽山)이 시중쉰과 함께 서북지역에서 혁명활동을 벌였고 부친 자오시민(趙喜民)은 시중쉰의 혁명에 가담했다.

특히 차기 상무위원의 대부분이 문화대혁명기에 하방 생활을 했거나 말단 생산근로직에 종사했던 경험이 있던 점을 보면 그가 '공산당의 초심'에 대한 사상적 일치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시 주석은 아울러 하방 경험의 강조를 통해 자신이 개인적 고난을 이겨낸 강한 지도자이고 일반 중국인과 뜻을 같이 하는 서민 지도자로서 이미지를 그려 권력집중을 정당화하는 소재로도 삼고 있다.




시진핑의 인맥 형성은 베이징 명문 101중학 시절의 동문인 류허(劉鶴) 중앙재경영도소조 판공실 주임이 이보다 앞서지만 사실상 량자허촌이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국원으로 승진한 류허는 앞으로 중책 가능성이 점쳐진다.

이어 대학시절 인맥으로는 칭화대 화공과 동창이자 룸메이트였던 천시(陳希) 중앙조직부 부부장과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시 주석이 공산당 입당 추천자이기도 한 그는 이번에 정치국원으로 발탁돼 부부장 꼬리를 뗄 것으로 보인다.

시 주석이 대학 졸업후 1979년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 비서로 공직에 발을 내딛으면서 본격적인 시자쥔(習家軍) 인맥 형성이 시작했다.

상무위원에 오른 리잔수(栗戰書) 중앙판공청 주임은 시 주석의 1982∼1985년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부서기·서기 시절 인접한 우지(無極)현 서기를 지내면서 막역한 사이가 됐다.

이후로 만들어진 시자쥔 인맥군을 보면 저장(浙江)성 시절의 옛 부하들인 즈장신쥔(之江新軍)과 푸젠(福建)성 및 상하이(上海) 시절의 간부, 비서 및 책사 등으로 구성된다. 대부분 업무실적과 성실성, 충성심을 기준으로 발탁이 이뤄졌다.

시 주석이 1985년 푸젠성 샤먼(廈門)시 부시장을 시작으로 2002년까지 푸젠성장을 지내는 동안 차이치(蔡奇) 베이징시 서기, 황쿤밍(黃坤明) 중앙선전부 부부장, 허리펑(何立峰) 국가발전개혁위 주임, 량젠융(梁建勇) 푸젠성 비서장, 정처제(鄭柵潔) 대만판공실 부주임 등을 '자기 사람'으로 아우르게 됐다.

이중 차이치, 황쿤밍이 정치국원단에 이름을 올렸고 허리펑은 중앙위원으로 승진했다.

시 주석이 2002∼2007년 저장성에서 성장, 서기를 지내면서 인재풀을 대폭 확대했다. 후계자 후보로 오르내리는 천민얼(陳敏爾) 충칭시 서기가 당시 저장성 선전부장을 지냈었고 정치국원에 오른 리창(李强) 장쑤성 서기는 당시 시 주석의 비서실장인 판공청 주임이었다.

잉융(應勇) 상하이시장, 중산(鐘山) 상무무장, 멍칭펑(孟慶豊) 공안부 부부장 등도 즈장신쥔에 속하고, 인사교류에 따라 푸젠성에서 저장성으로 옮겨온 차이치, 황쿤밍과도 다시 인연을 쌓았다.

천민얼이 처음 맡았던 시 주석의 칼럼 즈장신위(之江新語) 초고 집필 역할은 도중에 황쿤밍에게로 넘어갔다.

시 주석은 2007년 상하이 서기로 재직한 6개월의 짧은 기간에도 자기 사람을 만들었다. 이번에 정치국원이 된 딩쉐샹(丁薛祥) 중앙판공청 주임은 당시에도 시 주석의 비서였다. 양샤오두(楊曉渡) 중앙기율검사위원회 부서기 역시 당시 상하이시 통전부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이후 기율검사 계통으로 옮겨 일하다가 왕치산 서기의 바로 아래 부서기로 임명됐다.

시 주석은 집권 이후에도 책사·비서 자리에 새로운 시자쥔을 끌어썼다. 3대에 걸친 이론가 왕후닝(王호<삼수변+扈>寧)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14세 때 베이징대에 입학한 신동 리수레이(李書磊·53) 중앙기율검사위원회 부서기를 발탁했다.

여기에 당 중앙요직에 리잔수, 자오러지, 딩쉐샹, 황쿤밍 등 옛 부하들을 다시 불러들여 시자쥔 아성을 구축했다.

jooh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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