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던 책들 보태 '책방이듬' 개점…독자 참여하는 낭독회도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도서관 사서로 일하셨다는 선생님이 오셔서 제가 아끼고 아끼는 책들만 열한 권을 사가셨어요. 여기저기 낙서도 돼 있고 리뉴얼된 책도 나오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김이듬 시인이 보던 책이 더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시인 김이듬(48)이 책방 주인이 됐다. 최근 경기 고양시 일산호수공원 인근에 12평가량 규모로 '책방이듬'을 열었다. 시·소설·에세이·철학서 등 2천여 권을 갖추고 직접 내린 커피도 판매한다.
시인 박인환(1926∼1956)은 열아홉 살 때인 1945년 서울 종로3가에 '마리서사'라는 이름의 서점을 냈다. 시인 이전에 책 수집가였던 그는 자신의 문학·예술 분야 장서들로 서가를 채웠다. 책방이듬은 마리서사를 닮았다. 절반 이상은 시인이 수십 년 전부터 소장하던 책들이다.
초판 1쇄 희귀본이 대거 '시장'에 나왔다는 소문에 지난 25일 정식 개업 이전부터 문학·출판계 인사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김수영 산문집 초판본처럼 "(값을) 부르는 대로 줄 테니 팔라"는 주문도 들어온다.
"대학 다닐 때부터 아르바이트 해가며 한 권 한 권 모은 책이에요. 오시는 분들이 신기하게도 절판된 책이나 초판본은 귀신같이 알고 골라요. 절대 안 팔겠다고, 사람들이 와서 보고만 갔으면 좋겠다 생각한 책도 있어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쉬워요. 덤덤해지길 기대하고 있죠."
"멋있고 재밌을 것 같아서"라고 가볍게 말하지만 책방 주인을 꿈꾼 지는 오래됐다. 본격적으로 생각한 게 4∼5년 전이다. 지난해 유희경 시인이 신촌에 연 시집 전문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 갔다가 '정말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는 서점 주인은 물론 '책 처방사'를 자처했다. 평생 책과 함께 살아온 시인답게 사연을 듣고 나면 책 제목이 "버튼 누르듯 탁탁" 튀어나온다고. 책방이듬에 책이 있는지는 가리지 않는다. 없으면 다른 책방에서 구하면 되고, 있어도 꼭 살 필요는 없다. "저는 처방만 해요. 약은 약사에게 사면 되니까요."
책방이듬은 문학·출판 종사자가 많이 사는 일산·파주 지역의 명소가 될 조짐이다. 작가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서너 시간씩 앉아서 책을 읽다 가고, 개업 소식을 들은 문인들은 그릇이며 청소기·앞치마·고구마까지 보내왔다. 한때 시를 좋아했다는 인근 세탁소 주인에게 시집을 빌려주기도 했다.
"너무 많이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친구들 만나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책방이듬에서 책 읽던 청년이 소설가가 됐다, 이런 전설도 남았으면 좋겠어요. 시민과 문인들이 경계를 허물고 만나는 자리를 생각하고 있어요."
한 달에 세 번 정도 열 '일파만파 낭독회'가 그런 자리다. 31일 김민정 시인을 시작으로 일산·파주에 거주하는 시인·소설가·번역가·비평가 등을 초청할 계획이지만 꼭 문인이 주인공은 아니다. 다음달 9일 '기형도의 애송시 읽기' 낭독회 때는 기형도 유고시집을 기획·출간했던 임우기 평론가가 시인을 소개하고 독자들이 낭독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시인은 "한국의 낭독회는 수요자와 공급자가 따로 있는 게 항상 불만이었다"며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시의 빛나는 작은 열매가 있다. 그걸 끄집어낼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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