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윤고은 "버려진 것들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

입력 2017-11-05 09:40   수정 2017-11-05 16:29

소설가 윤고은 "버려진 것들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

폐기물 매립 둘러싼 이야기 그린 장편소설 '해적판을 타고' 출간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던 집 마당이 어느날 밤 파헤쳐지고 뭔가가 잔뜩 담긴 자루들이 그 아래에 묻힌다. 대체 누가, 왜, 무엇을 묻어놓은 것일까.

윤고은(37) 작가의 새 장편소설 '해적판을 타고'(문학과지성사)는 이런 미스터리하고 음산한 장면으로 시작해 독자를 금세 몰입시킨다.

열두 살 소녀인 주인공 '유나'는 두 어린 남동생들과 함께 소중한 집 마당을 빼앗겼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이후 가족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이야기한다. 아버지가 일하는 '센터'는 동물을 이용한 실험을 하는 곳이고, 아버지는 전에도 실험 후 폐기된 동물을 가져다 집 마당에 묻은 적이 있어서 유나는 이번에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불안해한다. 동네 사람들도 이 집 마당에서 어떤 유해한 성분이 흘러나올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우려했던 일은 점점 실체를 드러내고 유나를 비롯한 가족들은 집 마당에 죽은 토끼들이 대량으로 묻혀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폐기물을 잠시 맡았을 뿐이라는 아버지의 해명과는 달리, 센터 측에서는 이를 다시 거두어갈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폐기물 불법 매립에 관여한 소장은 좌천되고 이후 책임자들 역시 껄끄러운 일을 덮기에 급급하다. 그 사이 집 마당에서는 몸집이 큰 '슈퍼 지렁이'가 출몰하거나 나무에 꽃이 피지 않는 등 이상 징후가 나타나고, 가족은 급기야 이 집을 떠난다.

참다못한 아버지가 센터를 그만두고 가족의 피해와 센터의 불법 행위를 세상에 알리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으로 별 반향이 일지 않는다. 그러다 유나와 동생들이 집 벽에 그린 지렁이 그림과 낙서 덕분에 뜻밖의 출구가 열린다.

소설은 유해 폐기물 매립을 둘러싸고 힘 있는 자들의 무책임한 결정과 사후 책임 회피, 여기에 휘둘리는 힘없는 이들의 피해와 희생 등 암울한 사회 문제와 씁쓸한 세태를 그리면서도 그리 무겁지 않은 느낌을 준다. 오히려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선 소녀와 그 남동생들의 순진무구한 목소리는 집안에 닥친 어떤 불길한 기운을 어떻게든 밀어내는 활기를 내뿜는다. 심각한 상황에서도 아이들이 보이는 엉뚱한 반응은 웃음을 자아낸다.

"심각한 내용인데도 약간 유머러스한 톤의 이야기를 좋아해요.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 있는 걸 볼 때 끌리죠. 이번 소설도 상황 자체는 암울하지만, 아이들의 시선으로 보여주다 보니 톤이 조금 더 밝고 명랑해진 것 같습니다."

작가는 5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소설을 이렇게 소개했다.

또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세워 어른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의 부조리와 불합리함을 더 명징하게 드러내려 했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은 위험한 것이라도 손으로 만져보고 확인하려고 해요. 아직 경험한 게 많지 않아서 모든 게 자극이 되죠. 또 한편으론 어른들이 조금 더 해결책을 갖고 있고 위기에 잘 대처할 거라고 믿지만, 사실은 어른들의 세계가 생각보다 불완전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서로의 이해관계나 관성화된 것들, 안 좋은 습관들 때문에 불거지는 문제를 아이들이 더 잘 볼 거라 생각했죠."

소설 속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모티프는 '해적판'이다. 구하기 어려운 외국책들의 경우 정식으로 출간된 판본이 아니라 누군가가 마음대로 번역하고 인쇄해 만든 해적판이 떠도는 경우가 많다. 이 소설에서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해적판 책으로 등장한다. 유나 아버지의 부하 직원인 '루'가 유나에게 선물한 이 해적판에는 결말의 몇 페이지가 사라져 있다. 나름의 고난을 겪으며 조숙해진 유나는 암울한 결말을 상상하며 자신 역시 어른이 되기도 전에 이미 인생의 권태로운 결말을 엿봤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인간의 나이란 한 자리, 두 자리, 그리고 드물지만 세 자리 숫자, 그 세 종류 중 하나일 테고, 벌써 내 나이는 두 자리로 진입한 지 오래였다. 어른이 되어 하는 일이란 게 기껏 다른 사람 집에 잿빛 자루를 묻거나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전조 증상만으로 충분히 얼룩져 본편은 시작할 지면도 없는 듯한 기분이었다." (본문 97쪽)

그러나 소설의 결말은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10대인 주인공들은 서로에게 힘과 위로가 되며 희망이 있는 미래를 그려본다.

작가는 "주인공이 어른들의 태도에 실망하면서 미리 어른에 대한 선입견을 갖기도 하지만, 해적판이 얼마든지 본판과 다른 버전의 결말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각자의 선택에 따라 미래도 능동적으로 바꿔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작가는 전작 '밤의 여행자들'에서 재난으로 폐허가 된 지역을 소재로 쓴 데 이어 이번에도 폐기물을 사건의 발단으로 등장시켰다. 이번 소설은 특히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방사능 폐기물을 묻은 어느 집 마당을 텔레비전에서 본 뒤 생각해낸 이야기라고 했다. 찾아보니 우리 사회에도 그렇게 폐기물을 무책임하게 임시로 묻은 경우가 많더라는 것이다.

"저에겐 쓰레기가 주요 관찰 대상이에요. 전작 '무중력증후군'도 빵 봉지 성분표를 보다가 생각해냈죠. 용도를 다하고 버려진 것들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궁금해요. 슬프게 얘기하면 인간쓰레기 취급받는 사람들까지도 관심이 갑니다."

min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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