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병동소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고향이 뭐 별거냐. 지금 살고 있는 집이 고향이지."
1960∼1970년대 독일로 건너간 한국인 간호사는 뿌리를 잃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독일에서는 한국을 그리워했고, 한국에서는 독일 생활을 꿈꿨던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그래서 파독 간호사에게는 발을 딛고 살아가는 장소가 곧 고향이었다.
예술의전당이 3년 만에 선보이는 창작 연극 '병동소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파독 간호사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2시간에 압축한 작품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 혹은 한국을 떠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독일행을 택한 간호사 명자(전국향 분), 순옥(이영숙 분), 국희(홍성경 분)는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일을 시작한다.
이들은 낯선 환경과 어려운 독일어 때문에 적응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이내 자리를 잡는다. 계약 기간 3년이 지난 뒤 한국과 독일 사이의 기로에 놓인 이들은 모두 독일에 남기로 한다.
파독 간호사의 고달픈 생활과 외로움을 조명하던 연극은 후반부에서 굴곡진 현대사의 장면들을 진지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건드린다.
1976년 간호사들이 독일에서 체류권 허가를 얻기 위해 벌인 서명운동, 독일 기자 힌츠페터의 보도로 접한 5·18 광주 민주화운동, 1989년 갑자기 일어난 베를린장벽 붕괴가 차례대로 다뤄진다.
7일 김재엽 연출과 출연 배우, 파독 간호사 3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간담회에서 연극의 실제 주인공인 파독 간호사들은 "극이 매우 사실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1974년 베를린으로 이주한 서의옥 씨는 자신을 '아직 돌아오지 않은 병동소녀'라고 소개한 뒤 "우리의 역사가 짤막짤막하게 소개돼 상당히 감동적이었다"며 "때로는 눈물이 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소를 짓기도 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다른 파독 간호사인 김순임 씨는 서명운동을 회상하며 "그때는 한국이 상품이 아니라 노동력을 수출할 수밖에 없었다"며 "체류권을 획득하기 위해 공부하면서 우리가 정치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의 주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털어놨다.
독일에서 지금도 재독 한국인 여성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송금희 씨는 "5·18 당시에 한국 정부에 배반당한 느낌을 받았다"며 "빨갱이라고 협박을 받기도 했지만,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전단을 돌리고 간담회도 열었다"고 말했다.
연극은 세 명의 간호사와 우정을 나누며 이들의 삶을 주제로 논문을 쓴 학자 정민(김원정 분)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정민은 나무에 둘러싸인 묘지를 보면서 "숲은 경계가 없는데, 사람은 그렇지 않다. 태어난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야 한다. 국가나 민족 같은 뿌리는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2015년 2월부터 1년간 베를린에 머물며 한국계 이주민 여성을 만났다는 김재엽 연출은 "경계를 넘어서고 벽을 허물고 한계를 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국경이나 인종을 넘어선 사람들은 어떤 상상력을 갖고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연극은 12월 3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상연된다. 관람료는 1만5천∼5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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