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한국과 콜롬비아 축구 대표팀의 평가전이 벌어진 지난 10일 수원월드컵경기장. 한국이 2-0으로 앞서 가던 후반 18분 양 팀이 몸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콜롬비아의 에드윈 카르도나(보카 주니어스) 선수가 한국의 기성용(스완지시티)을 향해 두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양옆으로 당기고 입을 벌리며 조롱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경기가 끝난 뒤 기성용은 취재진에게 "인종차별 행동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고, 팬들도 인터넷 등에서 비판과 항의를 쏟아냈다.
카르도나는 11일 콜롬비아 축구협회 홈페이지에 영상을 띄워 "누구도 비하할 목적은 없었고 내 행동이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하거나 오해를 일으켰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콜롬비아 축구협회도 "카르도나 선수가 한국 선수들을 향해 부적절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해 한국 대표팀과 한국 국민에게 정중히 사과드리며 이러한 행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공문을 보냈으나 한국 팬들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더욱이 콜롬비아 방송의 한 진행자가 카르도나의 동작을 재연하며 한국인을 놀리는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양국 간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대한축구협회는 콜롬비아 축구협회에 공문을 보내 해당 선수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요구했다.
미국 프로야구 월드시리즈 3차전 경기가 펼쳐진 10월 28일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미닛 메이드 파크. 쿠바 출신의 휴스턴 애스트로스 타자 율리에스키 구리엘은 LA 다저스의 일본인 투수 다르빗슈 유를 상대로 홈런을 친 뒤 더그아웃으로 돌아와 눈을 찢는 동작을 취하고 중국 사람을 비하하는 스페인어 '치니토'(Chinito)라는 말도 했다. 구리엘은 뒤늦게 다르빗슈 선수와 팬들에게 사과했으나 엄청난 비난에 휩싸였고 내년 시즌 5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한국 야구팬들도 구리엘을 비난하고 다르빗슈를 위로하는 글을 쏟아내 "구리엘이 한일 간의 우호 회복에 기여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는 작고 옆으로 길게 찢어진 듯한 눈을 '칭키 아이'(chinky eye), 혹은 '슬랜트 아이'(slant-eyed)라고 부르며 동양인의 생김새를 비하하는 은어로 사용하고 있다. 두 손으로 눈을 양옆으로 당겨 째진 눈을 만드는 동작도 아시아인을 조롱하는 제스처로 쓰인다. 몇 해 전에는 미국 커피체인점의 점원이 이름 대신 찢어진 눈 모양의 이모티콘을 음료 컵에 그려서 한국인 고객에게 건넸다가 불매운동을 자초하기도 했다.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며 '우∼' 소리를 내는 원숭이 흉내도 아시아나 아프리카인을 깔보는 동작으로 쓰이고 있다. 유럽 리그의 축구경기장에서 일부 관중이 기성용이나 손흥민 등 한국 선수를 상대로 이런 동작을 해 말썽을 빚곤 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인종차별적 언행을 한 관중에게도 입장금지 등의 제재를 하고 있다.
카르도나나 구리엘을 향해 쏟아진 비난의 글 가운데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일부 네티즌은 "감히 콜롬비아 선수가…", "지들도 유색인종인 주제에…", "쿠바 따위가 어따(얻다) 대고…" 등의 글을 남겼다. 똑같이 백인에게 인종차별을 당하는 처지의 라틴계 인디오 혼혈(메스티소) 선수가, 혹은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 출신이 한국인이나 일본인을 놀려 더욱 분노가 치민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지난 4월 19일 SBS TV의 코미디 프로그램 '웃찾사-레전드매치'에서 홍현희는 흑인 분장을 하고 출연해 흑인을 놀렸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미국의 온라인 매체 버즈피드도 이를 소개하며 "사람들은 단지 캐릭터의 검은 피부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난 모든 것들에 대해 분노했다. 모든 인종에게 이것은 불편하게 느껴진다"며 일침을 놓았다. 호주 출신의 백인 연예인 샘 해밍턴도 SNS에 "진짜 한심하다. 도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행동 언제까지 할 거야? 인종을 그렇게 놀리는 게 웃겨? 예전에 개그 방송 한 사람으로서 창피하다"라고 비판의 글을 올렸다. 그러자 개그맨 황현희는 "예전에 '시커먼스'라는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개그가 있었는데 그것도 흑인 비하인 거냐?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말라"고 반박했다가 네티즌의 집중포화를 받고 글을 내려야 했다.
KBS 2TV '쇼 비디오자키'에서 장두석·이봉원 콤비의 '시커먼스'가 인기를 끌던 1987년에는 국내 체류 외국인이 4만5천여 명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40배가 넘는 208만여 명을 헤아린다. 기술의 발달과 한류 덕분에 우리나라 TV 프로그램을 전 세계 시청자들이 보고 있다. 30년 전의 잣대를 갖고 "예전엔 다 그랬는데 이게 무슨 문제냐"라는 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다.
서양에서도 인종차별 논란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유색인종에 대한 백인들의 우월감은 훨씬 뿌리가 깊다. 그러나 우리나라보다 앞서, 비교적 오랜 기간에 걸쳐 다문화사회로 이행돼왔기 기준과 원칙에 관한 공감대가 이뤄져 있다. 설혹 아시아인이나 흑인을 깔보는 마음을 품고 있다 해도 그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면 안 된다는 상식을 대부분 지니고 있으며, 이를 어기면 제재나 처벌을 받는다. 급속한 변화 과정에 놓인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인식이 희박하므로 차별금지법을 제정해 인종이나 종교 등에 따른 차별이 범법행위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영화 '국제시장'에는 독일의 탄광과 베트남 전쟁터에서 돈을 벌다가 귀국해 노인이 된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가 동남아 출신 노동자를 놀리는 고등학생들을 나무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오랫동안 인종차별의 피해자로 살아온 한국인이 외국인노동자에게 가해자의 모습을 보이면 이들 역시 "자기네들은 언제부터 잘살았다고…"라는 비아냥거림을 쏟아낼 것이다. 외국인들의 인종차별에 분노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이중잣대를 돌아봐야 한다. 태생적인 차이를 두고 인간을 차별하는 것은 법 이전에 인간의 도리와 세계시민의 태도에 어긋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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