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갤러리서 개인전 '분수령'…장소·기억 보여주는 작업들 선보여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수백 개의 뗀석기, 왕부들·목단·큰강아지풀 등 온갖 씨앗이 담긴 투명한 약병들, 벽면 하나를 뒤덮다시피 한 지도…….
고고학연구소인가 싶은 이곳은 서울 중구 회현동 금산갤러리 전시장이다.
이곳에서는 8일부터 정재철(58) 개인전 '분수령'이 열리고 있다.
'공간과 장소, 시간과 기억'이라는 평생의 화두를 작가가 30년 가까이 머물렀던 과천 관악산 자락을 무대로 펼쳐 보이는 작업이다.
작가가 과천에 내려온 것은 1987년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한 직후였다.
그는 그동안 과천 일대에서 3차례 정도 작업실을 옮겼다.
정성스레 작성한 라벨까지 하나하나 붙여둔 돌과 씨앗은 최근까지 작업실이 있었던 갈현동 가루개 마을을 비롯해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하나둘씩 모은 것이다.
뗀석기처럼 보이는 돌들은 작가가 관련 당국과 연구소 등에 보내 문의했으나, 조사 결과 평범한 돌임이 드러났다고 한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이러한 과정을 설명하다 말고 "밭고랑 고고학 중입니다"라면서 허허 웃었다.
작가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돌과 씨앗을 모으는 이유는 이야기, 즉 이들에 담긴 유구한 시간의 흐름과 인간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채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록을 남기고 드로잉을 그리고 마을 풍경을 촬영하는 등의 작업을 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드로잉 작품을 들여다본 뒤 "이렇게 드로잉을 같이 놔두면 (돌이) 말을 할지도 모르거든요. 언제쯤 말을 할까요?"라고 묻는 작가의 얼굴은 진지했다.
전라남도 순천에서 나고 자란 작가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술 시장에서 촉망받는 조각가였다.
1988년 중앙미술대전 대상, 1996년 김세중청년조각상 등 상복도 많았다.
황달성 금산갤러리 대표는 "당시 갤러리마다 잡고 싶어 했던, 힘이 넘치는 조각을 보여줬던 작가"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작가는 이후 공간과 장소를 탐색하는, 시장이 크게 반기지 않을만한 작업에 천착해 왔다.
7년간 실크로드를 여행하며 현지인들에게 폐현수막을 나눠준 뒤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기록한 '실크로드 프로젝트'며 미술이 해양오염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고민한 '블루오션 프로젝트'는 상업성과는 거리가 멀다. 공공미술 프로젝트 한두 개를 맡아 조금 벌었던 돈도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들어갔다.
작가는 "(갤러리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작가"라며 한껏 몸을 낮췄지만, 작품의 일관성, 돈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꿈을 추구하는 모습 때문에 전시 개최를 결정했다는 것이 황 대표의 설명이다.
작가는 '밭고랑 고고학' 작업을 고수하는 이유를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공간이 장소로 성장하려면 사람에게 그 공간이 기억되고, 또 추억 속에 자리 잡는 일이 반복돼야만 해요. 사람과 장소의 관계 맺기라는 것이 풍경을 똑같이 그린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잖아요."
전시는 12월 1일까지. 문의 ☎ 02-3789-6317.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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