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드문 피겨에서 불모지 일군 개척자들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화려한 점프 기술의 경연장인 피겨스케이팅에선 안전 등을 이유로 금지된 동작들이 일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공중제비 스타일'의 점프다.
아무리 멋지게 성공하더라도 오히려 감점을 당하는 공중제비 점프를, 그것도 올림픽 무대에서 보란 듯이 펼친 선수가 있다.
바로 '빙판의 흑진주'로 불린 프랑스의 피겨 스타 쉬르야 보날리다.
1973년생으로, 생후 18개월에 프랑스 가정에 입양돼 자란 보날리는 어린 시절 체조선수였다가 11살 때부터 스케이트를 신었다.
1991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여자 싱글에서 우승한 후 시니어 무대로 나와 1991∼1995년 5년 연속으로 유럽선수권을 제패했다.
그러나 유럽을 벗어나 국제무대에서는 금메달과 인연이 없었다.
1993∼1995년 세 차례의 세계선수권에서 보날리는 옥사나 바이울(우크라이나), 사토 유카(일본), 천루(중국)에게 차례로 금메달을 내주고 2위에 머물렀다.
1992년 자국에서 열린 알베르빌동계올림픽부터 올림픽도 내리 세 차례 출전했으나 각각 5위, 4위, 10위로 마쳤다.
여자 선수 최초로 실전에서 쿼드러플(4회전) 점프를 시도할 정도로 우월한 기량을 갖췄던 보날리는 자신이 만년 2인자에 그친 것이 자신의 피부 색깔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줄곧 "피겨계는 백인들의 세상"이라고 목소리를 높여왔고 흑인이라는 이유로 빙판에서 차별을 받아왔다고 주장했다.
1994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사토 유카에 밀려 은메달을 땄을 때 그는 처음에 시상대에 오르길 거부했고, 마지못해 올라서도 은메달을 받자마자 풀어버린 채 분루를 삼켰다.
마지막 올림픽인 1998년 나가노올림픽에선 쇼트프로그램이 끝난 뒤 기대에 못 미치는 점수가 나오자 점수를 끝까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 키스앤드크라이존을 떠나기도 했다.
당시 쇼트에서 10위를 차지해 메달권에서 벗어난 보날리는 다음날 프리스케이팅에서 공중에서 뒤로 한 바퀴 돌아 한 발로 착지하는 '백플립' 공중제비를 보란 듯이 성공시켰고, 이 대회를 끝으로 아마추어 선수 생활을 마쳤다.
심판과 관중을 모두 놀라게 한 보날리의 백플립은 빙판에서 늘 소수자로 차별과 편견에 맞서야 했던 '악동' 보날리의 마지막 저항의 몸짓이었다.
보날리 이전에도, 이후에도 피겨스케이팅에서는 흑인 선수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흑인이 타고난 신체조건 덕에 대부분 종목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특히 상대적으로 뛰어난 리듬감으로 정평이 나 있어 피겨 종목에 유리할 것 같지만 수 차례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건 흑인 피겨 선수는 아직 한 명도 없다.
아프리카 등 더운 지역에 사는 흑인들이 피겨뿐 아니라 다른 동계종목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기도 하고, 하계종목들에 비해 장비나 훈련 비용 등이 많이 든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피겨로만 한정해보면 심판의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한다는 점에서 보날리의 주장대로 주류 백인 틈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했으리라는 것도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금기를 깬 백플립 연기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보날리처럼 빙판이라는 불모지를 개척해나간 흑인 선수들이 있다.
보날리보다 선배인 미국의 데비 토머스는 1998년 캘거리동계올림픽에서 여자 싱글 동메달을 따며, 동계올림픽의 첫 흑인 메달리스트가 됐다.
1986년 세계 챔피언이었던 토머스에게는 아쉬움이 남는 메달 색깔이었지만, 동계스포츠 역사에 한 획을 긋기엔 충분했다.
토머스는 그러나 두 차례의 이혼과 정신질환으로 빈털터리가 된 채 우울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안타까움을 주기도 했다.
2010년 밴쿠버올림픽에서는 프랑스의 야니크 보뇌르와 바네사 제임스가 첫 흑인 커플로 피겨 페어 종목에 출전했다.
인터넷에서 처음 만난 후 영국 국적인 제임스가 프랑스로 귀화하면서까지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된 이들 커플은 당시 올림픽에서 14위에 그쳤지만, 고난도의 점프과 아찔한 리프트 동작을 멋지게 해내며 큰 박수를 받았다.
mihy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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