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국내시장·비영어권 핸디캡에 특수한 규제 환경까지
(서울=연합뉴스) 임화섭 기자 = 미국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별다른 표시가 없는 교차로에서 '당연히' 유턴을 해도 된다. 유턴하면 안 되는 곳에만 유턴 금지 표시가 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와 반대다. 별다른 표시가 없으면 교차로에서 유턴은 당연히 불법이고, 표지판이나 노면에 유턴 가능 표시가 있어야 유턴을 할 수 있다.
이처럼 많은 분야에서 우리나라 규제 시스템의 근간은 '되는 것'을 열거하는 '포지티브 시스템'이다. 즉 '되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은 한 모두 원칙적으로 금지 대상이라는 뜻이다.
◇ '포지티브식 규제'의 문제점
한국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거나 외국에서 성공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사업을 시작하려는 국내외 스타트업들이 가장 흔히 부딪히는 장애물이 바로 이런 우리나라의 포지티브식 규제 시스템이다.
이런 방식의 규제 시스템은 일제시대로부터 시작해 개발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법체계와 비즈니스 관행 전반에 매우 깊숙하게 뿌리를 내렸다.
이런 시스템은 '시키는 것'만 안심하고 할 수 있으며 '시키지 않은 것'을 하면 처벌받는다는 두려움을 심어 주므로 창의성을 매우 심각하게 저해한다.
특히 이런 시스템은 비즈니스에서 정경유착을 부추기는 경향도 있다.
'해도 되는 것'에 해당하는지가 확실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 정치권과 규제 당국이 규제 변경과 해석을 통해 사업 허용이나 불허뿐만 아니라 형사처벌 여부까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실질적으로 갖게 되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업계는 현행 규제를 이유로 새로운 사업 모델을 시도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은 국내 산업 생태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 해외 업체와의 역차별 논란
유별나게 심한 국내 규제 탓에 국내 소비자가 불편을 겪고 국내 기업이 발목이 잡히는 '역차별'을 겪는 사례도 적지 않다.
게임 분야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청소년 보호' 명목으로 시행한 '셧다운제'(만 16세 미만 청소년이 오전 0∼6시에 온라인 게임에 접속할 수 없도록 게임업체가 조치를 취하도록 한 제도)와 이를 위한 연령확인 혹은 성인인증 의무화 등으로 소비자와 기업 모두 큰 불편을 겪고 있다.
120여개 스타트업으로 구성된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은 지난 14일 성명서에서 "기업에 부과되는 각종 법률적 의무와 규제는 국내 기업에만 적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형식적이고 불합리한 규제는 이용자의 해외 서비스 이용만 부추기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제도 정비가 시급하게 필요한 또 다른 분야로 스타트업 업계 관계자들은 날로 커지는 이른바 '공유 경제' 내지 '온 디맨드 경제'를 꼽는다.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는 에어비앤비나 우버 등 노하우를 쌓아 온 글로벌 기업에 국내시장을 고스란히 내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풀러스 김태호 대표는 "숙박부터 주차장까지 공유 경제와 관련해서는 많은 법이 실타래처럼 묶여 있는데 특별법을 만들어 스타트업이 성장하고 혁신할 기회를 줘야 한다"며 "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예상'만 갖고 규제하는 건 많은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 일"이라고 우려했다.
◇ '네거티브 규제' 전환 목소리 높아
한국의 포지티브 규제 시스템 하에서 '현행 법령에 규정돼 있지 않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법"이라는 말이나 똑같은 경우가 많다.
이를 합법으로 만들어서 사업을 하려면 정부와 국회가 규제 법령을 바꾸도록 해야 하는데, 기득권을 가진 기존 업계의 반발이 매우 심하기 때문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고 그 사이에 사업 기회가 사라지는 사례도 흔하다. 새로운 사업 모델을 시험하는 것 자체를 꺼릴 수밖에 없다.
혁신을 장려하려면 우리나라의 규제 시스템 전반을 하루빨리 네거티브 규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디지털경제협의회와 리서치앤리서치가 최근 산업계 전문가 152명과 일반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디지털경제 및 창업혁신 관련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82%는 네거티브 규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또 10명 중 8명은 국내 기업의 역차별 규제(78%), 그림자 규제(79%)가 심각하다고 응답했다.
대한변호사협회도 13일 성명에서 "포지티브 시스템을 채택한 법률 규정 하에서는 기존 법률이 예상하지 못했던 신사업의 경우 불법이 된다"며 네거티브 규제로의 전환을 촉구했다.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인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언스 센터장은 "정부가 기존 시장에 적용되는 규제를 작은 회사에도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큰 회사로 성장할 수 있는 싹을 죽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기업이 새로운 시도를 할 때 (제도상) 애매한 부분이 있더라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처럼 막다 보면 나중에 외국 기업에 국내시장을 내줄 위험이 있다"고 강조했다.
solatid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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