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대회 교수, 신위의 비평 담긴 선본(善本) 발굴·번역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소첩이 기생 명부에 들어가 떠도는 것은 운명입니다. 그러나 천성이 뜻을 굽히거나 남에게 지지 못합니다. 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리 황금 한 바구니와 진주 한 말을 들고 날마다 찾아와서 저를 유혹해도 어찌 제 마음이 흔들리겠습니까."
조선 후기 개성 갑부의 후예인 한재락(생몰년 미상)은 평양 기생 일지홍(一枝紅)의 외모를 "눈동자가 샛별처럼 반짝이고, 눈썹은 봄의 산인 양 담담하다"고 평한 뒤 일지홍이 내뱉었다는 탄식을 이렇게 적었다.
그런데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자하(紫霞) 신위(1769∼1847)가 일지홍의 탄식을 접하고는 몇 마디 거들었다. 신위는 "평소의 뜻이 참으로 기이하구나. 그러나 황금 한 바구니와 진주 한 말을 물리치는 일도 어렵단다"라며 감탄과 의구심을 함께 나타냈다.
조선시대 기생을 주제로 한 유일한 단행본인 '녹파잡기'(綠波雜記)가 10년 만에 다시 번역돼 나왔다. 녹파잡기의 존재를 학계에 처음 소개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지난 6월 서울의 한 고서점에서 이전에 알려진 책보다 상태가 좋은 선본(善本)을 입수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번에 출간된 녹파잡기에는 한재락이 쓴 글은 물론 기존 번역본에는 빠졌던 신위의 비평, 새롭게 발굴된 책의 영인본(복제본)도 함께 실렸다.
녹파잡기는 벼슬길에 나아가길 포기한 사대부인 한재락이 평양 기생 중에서도 뛰어난 인물 66명과 기방 주변의 명사 5명을 만난 뒤 1829년께 집필한 책이다. 당대 유명한 문인이었던 신위와 이상적, 강설의 글도 실렸다.
역자인 안 교수는 "19세기에는 기생이 시회(詩會)를 만들었고, 문인도 기생과 어울리면서 시를 지었다"며 "이러한 사회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녹파잡기"라고 설명했다.
녹파잡기에 담긴 신위의 비평 가운데 흥미로운 대목은 은퇴한 기생에 대한 평가다. 그는 남편을 쫓아 시골집에 머물며 늙어 죽기로 기약한 명애(明愛)에 대해 "영웅다운 결말"이라고 썼다. 반면 서울로 떠났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노류장화(路柳牆花·기생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노릇을 하는 차옥(車玉)은 "영웅다운 결말을 맺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또 신위는 영희(英姬)에 대해 "이 책에서 첫 번째 가는 여인"이라고 했고, 난혜(蘭蕙)에 대해서는 "미끄러운 유리 위에 붉은 옥 같은 미인"이라고 칭송했다.
안 교수는 "녹파잡기는 현대로 치자면 연예계 최고의 스타만을 골라 인터뷰한 책에 견줄 만하다"며 "분량이 많지 않은 소품서지만, 내용은 조선시대 기생과 기방 문화를 살펴보는 데 독보적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휴머니스트. 240쪽. 1만5천원.
psh59@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