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민당 피자 시켜 먹으며 8시간 숙의…일단 연정논의 문호 개방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 차기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다수 기독민주당ㆍ기독사회당 연합, 자유민주당, 녹색당 간 협상 실패로 헌정 초유의 위기를 겪는 독일이 다시 한 번 대연정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흐름이다.
그런 조짐이 급부상한 발단은 정파 간 대화 중재에 나선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과 마르틴 슐츠 사회민주당 당수의 23일 오후(현지시간) 회동이다.
1시간 넘는 이 만남 직후, 슐츠 당수가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의 권고를 받아들여 최대 정파인 기민기사연합과의 대연정 협상에 문을 열어두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전언이 나왔다.
결국, 또 대연정으로 가는 것일까.
사실 1, 2당 최대다수연합을 주로 뜻하는 대연정은 독일 정치사에서 예외적인 것이었다. 노선과 가치로 웅변하는 정당이라면, 그것도 보수 기독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양 진영이 고도로 세력화한 전통의 독일 정당체제 아래서라면 이념적 색채가 분명한 소연정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1966년 하반기 예외적인 일이 생겼다. 전후 독일 근간을 닦은 기민당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총리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총리 집권기 소수 파트너였던 자민당이 기민당과 재정정책에서 이견을 보이면서 내각에서 자당 각료를 철수시킨 것이다. 연정은 당연히 무너졌고 에르하르트에 이은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총리는 1969년까지 빌리 브란트의 사민당과 최초의 대연정을 가동한다.
68세대에 좌절을 안긴 나치 부역 논란이 따르던 키징거는 약체 중 약체 총리였다. 당시 정부 대변인은 그를 두고 "걸어 다니는 조정위원회"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정위는 독일식 양원 의회제도에서 상, 하원이 이견을 조율하려고 모이는 회의체를 말한다. 이는 직전 두 총리에 비해 카리마스와 영향력이 애초 크게 밀리는 데 따른 결과이기도 했지만, 색깔이 너무 다른 정당이 대연정 아래 묶여있는 데 따른 필연이기도 했다.
이 역대 첫 대연정 역사는 3년 후 마무리되었고 냉전기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의 동방정책으로 유명한 브란트의 사민당이 1969년 기민기사연합에 이은 2당의 성적에 그쳤음에도 자민당과 소연정을 꾸리며 '사민당 시대'를 열었다. 자민당은 당시까지만 해도 경제적 보수주의(친기업)보다는 사회적 자유주의(이념적 자유)가 돋보이는 약방의 감초 같은 정당으로서 연정의 단골 소수 파트너였다.
독일은 이후에도 사민당ㆍ자민당 소연정의 헬무트 슈미트 집권, 기민기사연합ㆍ자민당의 헬무트 콜 집권, 사민당ㆍ녹색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집권으로 이어지는 소연정 시기를 지났다.
그러다 첫 대연정 이후 40년째 되던 해인 2005년, 기민기사연합의 앙겔라 메르켈은 역대 두 번째 대연정을 구성하게 된다. 그건 선택이 아니라 사실상 필수였다. 소수 파트너인 자민당과의 합산 의석이 과반에 미달했을 뿐 아니라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녹색당이 짝짓기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때까지만 해도 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의 지지율은 35.2% 대 34.2%로 비슷했고 메르켈의 권력은 지금만큼 우뚝하지 않았다. 이에 더해 역대 첫 대연정 3년을 거쳐 브란트 시대를 열었던 사민당의 '좋은 기억'은 대연정 옵션의 길을 텄다.
하지만 2009년 총선에서 자민당은 사상 최고인 14.6% 지지율을 얻었고, 기민기사연합이 주도하고 자민당이 소수당으로 가세하는 우파 소연정은 자연스럽게 부활했다. 그해 총선은 급진좌파인 좌파당(Die Linke)도 11.9%의 득표율을 올리며 좌, 우 대결 구도를 선명히 했고 그 영향 아래 우파 연정은 진영 논리 차원에서도 필연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렇게 메르켈 집권 2기가 흐른 뒤 맞은 2013년 총선 결과는 반전이었다. 자민당은 부자와 업계 이익 대변에 치우친 '고객정당'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미숙한 30대 신진 지도부가 민심을 다 잃어버려 의석배분 최소득표율인 5% 지지도 받지 못했다. 하여, 메르켈은 다시 사민당에 손을 내밀었고 역대 세 번째 대연정이 가동된 뒤 오늘에 이르렀다.
메르켈 시대에만 두 번 출현한 대연정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최대다수를 포괄하는 안정성에 있다. 전날 주간 슈피겔 온라인 디르크 쿠르뷰바이트 부편집장이 독자에게 전하는 '모닝 브리핑'에서 메르켈주의(主義)의 요체로 '고요(평온)와 안정'을 든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그는 메르켈이 최대의 의견일치 도출을 위해 "거의 모든 이를 고려하고 차이를 지양하고 갈등을 다독이고 윤곽을 흐렸다"며 정체성보다는 실용성에 기운 중도 수렴의 메르켈식 정치를 비평했다.
그러나 단점은 항시적 소수배제 현상을 유발한다는 거다. 대연정 밖 야당 목소리는 압도적 다수 앞에 맥을 못 추기 마련이다. 같은 맥락에서 선명하게 대비돼야 할 의제가 좋게 말하면 항상 절충되고, 나쁘게 말하면 매번 물타기로 흐릿해져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쿠르뷰바이트 부편집장이 "메르켈과 함께 보수주의도 저물고 자유주의도 저물고 사회민주주의와 녹색주의도 뒤섞였다"고 주장한 이유다.
그럼에도 두 정파를 대연정 협상장에 가두려는 압박은 거세지고 있다.
정부에 경제자문을 하는 페터 보핑거 뷔르츠부르크대 교수는 "대연정을 하는 것이 유럽통합을 이끄는 데 최적"이라고 했고 다른 정부 경제자문역인 라르스 펠트 프라이부르크대 발터오이켄연구소 소장 역시 유럽연합(EU) 발전을 위해선 분열적 연정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또, "소수연정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마르첼 프라처 독일경제연구소 DIW 소장), "재선거는 절대 안 된다"(구스타프 호른 거시경제ㆍ경기조사연구소(IMK) 노조분과 운영책임자) 같은 목소리도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수연정이 다수연정으로 가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미하엘 휘터 쾰른 독일경제연구 IW 노동분과 운영책임자), "기민기사연합은 소수연정을 꾸리고 중요한 경제정책을 두고선 그때그때 다수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경제연구소 Ifo의 클레멘스 푸에스트 소장) 등 이견도 계속 나오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메르켈 대연정 기간, 사민당이 정책엔진으로 주로 기능했지만 운전석에 앉아 있는 메르켈이 과실은 다 챙겼다는 평가를 많이 한다. 사민당의 최종 선택이 주목되는 또 다른 이유다.
한편,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SZ)은 변화한 상황을 업데이트한 24일 새벽 기사에서 사민당이 대연정 불가 태도를 버렸는지는 불분명하다고 보도하고 "대통령직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 다른 정당들과 대화할 태세가 돼있다"라는 후베르투스 바일 사민당 사무총장의 설명을 옮겼으며, 다른 일간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은 사민당이 대연정을 더는 배제하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독일 언론은 특히 사민당 지도부가 24일로 넘어가는 밤새, 피자를 시켜 먹으면서까지 무려 8시간 숙의했고 일각에서 나온 슐츠 퇴진 문제에 관해서는 전혀 논의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 볼프강 티어제 전 하원의장과 게지네 슈반 전 사민당 대통령후보가 공개서한에서 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에 더해 녹색당까지 묶는 속칭 '케냐 연정' 추진을 제안했다고 SZ는 전했다. 이들 사민당 원로가 케냐 연정을 말하는 것은 기사기사연합과 사민당 의석을 합쳐봐야 불안정한 과반이기 때문이다. 케냐 연정은 각 당 상징색(검은색, 빨간색, 녹색)이 케냐 국기색과 같은 데서 연유한 작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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