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이제야 진짜 작가 된 느낌"

입력 2017-11-27 16:40   수정 2017-11-27 20:24

박범신 "이제야 진짜 작가 된 느낌"

동아시아 근대 100년사 다룬 장편소설 '유리' 출간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첫 장을 쓰고 났더니 이야기가 끝까지 쭉 대로처럼 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매우 행복하게 썼고, 이것을 위해 지난 44년 동안 작가 생활을 연습해온 느낌이었어요. '이젠 내가 진짜 작가가, 자유로운 작가가 됐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굉장히 놀라운 축복이었다고 생각해요."

소설가 박범신(71)은 27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43번째 소설 '유리'를 이렇게 소개했다.

"이 소설은 작가로서 내게 새로운 길을 열어줬습니다. 과거에 젊은 인기작가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고, 한때 절필을 했다가 3년 만에 소설을 쓰면서 일종의 갈망기도 있었지요. '갈망 3부작'으로 불리는 '촐라체', '고산자', '은교'는 사회 현상에 포커스를 두기보다 인간 본원의 영혼에 대한 문제에 집중한 시기였어요. 이제 내가 얼마나 소설을 더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마지막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줬습니다. 도도하고 장대한 이야기의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준비가 됐다는 느낌이 들어요."

신작 '유리'는 1915년에 태어나 2015년 죽음을 맞이하는 남자 '유리'의 방랑기 속에 한국, 일본, 중국, 대만의 동아시아 100년 역사를 담은 작품이다. 작가는 지난해 3월부터 7월까지 모바일플랫폼 카카오페이지에서 이 소설을 연재하며 젊은 독자들을 만났다.

"소설 속엔 '짐승의 시대'라고 명명했는데 우리가 겪어야 했던 고단한 역사 이야기를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역사 이야기를 무겁게 느껴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재미있게 읽게 해주고 싶어서 초반부에 약간 어드벤처 형식으로 시작했죠. 뒷부분이 오히려 무거워졌는데, 이런 전략이 잘 먹혀서 연재할 때 반응이 좋았습니다."

젊은 독자가 대부분인 이 모바일 페이지에서 9만 명이 이 소설을 읽었다. 이번에 나온 책 역시 만만치 않은 분량이지만, 한 번 손에 잡으면 책장이 휘리릭 넘어간다.

소설에서 주인공 유리는 어릴 때부터 구렁이와 대화를 하다가 혀가 길어진다. 어린 시절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하고 키가 자라기를 멈췄고, 친일 앞잡이였던 큰아버지를 죽이고 고향을 떠나 풍진 모험을 하는데, 은여우나 원숭이, 햄스터 같은 동물들이 친구가 돼 어려움에서 구해준다. 공간적 배경으로 한국을 '수로국', 일본을 '화인국', 중국을 '대지국'으로 설정해 판타지소설 같은 느낌도 든다.

"배경이 된 시대가 너무 고통스러운 시대였거든요. 고통스러운 시대를 리얼리스틱하게만 그리면 더 무거워질 것 같았어요. 가능하면 은유와 우화를 동원해 재밌게 하자 싶었죠. 또 자칫하면 확인되지 않은 역사적 팩트들이 나를 억압할 수도 있고요. 동물들의 경우에는 집단 이데올로기가 모든 인간을 반(反)인간화하는 시대에 동물이 오히려 더 인간적이 되는 은유가 담겨있다고도 할 수 있어요."






작가는 연재를 끝낸 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와 한국 현대사를 보강한 500여 쪽 분량의 이야기를 새로 써서 더했다. 특히 소설 속에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깊은 산 속에 평화로운 공동체를 꾸리고 살다가 위안소에서 임신해온 여성('붉은댕기')에게 낙태를 강요하는 장면은 매우 처절하게 그려졌다. 붉은댕기는 결국 공동체에서 쫓겨나 사막에서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가장 아프게 쓴 대목이죠. 그들끼리 미워한 건 아니었지만 서로 자학적인 지점에 빠지죠. 지난 여름내 그 챕터만 썼어요. 보완하고 신중하게 썼어요. 주인공 유리를 통해 전달하는 거니까 밀도 있게 고통을 그려내야 했죠. 또 독자들 입장에서는 리얼리티를 잘못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붉은댕기의 현신이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김점순의 얘기를 후반부에 더 써서 넣었습니다. 지난 1년을 그렇게 보낸 것이 이 소설에서는 굉장히 의미가 있었어요."

작가는 582쪽 분량의 대하소설을 완성하고도 미진한 부분이 남아있다고 했다.

"이 소설은 내용으로 보면 1930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돼 박정희 유신에서 끝나고 이후는 거의 안 그렸습니다. 하지만 나는 해방되고 독립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른바 '짐승의 시대'라고 불렀던 반인간적 문화는 청산되지 않았다, 현재진행형이라고 보거든요. 그런 면에서 더 인간적인 시대에 대한 작가의 갈망이 남아있고요, 이번에 다룬 시대 이전에 더 고단했던 유리 아버지의 삶이라든지, 박정희 유신 이후의 이야기도 기회가 되면 쓰고 싶어요. 다 하나로 연결될 텐데, 3부작으로 완성하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그는 애초 이 작품을 1년 전 출간하려고 했다가 뜻밖의 성추문 논란에 휘말리면서 출판을 잠정 연기했었다. 지난 1년간의 소회를 묻자 그는 무척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사회적 자아로서의 박범신은 죽은 거죠. 죽음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어요. 그 사건의 팩트를 다투거나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당시 같이 있었던 모든 여성분들이 공개적으로 불쾌한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는 것, 그 팩트 자체는 인정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연루되어서 기사가 나는 것 자체가 제 독자들에게 너무 미안했어요. 박범신이란 작가는 반세기에 걸쳐 1천만 이상의 독자가 키워낸 것이거든요. 독자들이 상처받는 것이 가장 두려웠고 말할 수 없이 죄송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1년 동안은 내가 누구인가 깨닫는 시간이었고, 문학을 안 하면 죽음 같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걸 매일 깨닫는 나날이었습니다. 앞으로 좋은 소설로 누를 끼쳤던 독자들에게 갚고 싶습니다."




min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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