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국회의원 변신한 카라스키야 "그날 경기에서 져서 친구 얻었다"
(서울=연합뉴스) 이대호 기자 = 1977년 11월 26일. 홍수환(67) 한국권투위원회(KBC) 회장은 파나마에서 열린 엑토르 카라스키야(57)와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페더급 초대 타이틀을 걸고 맞붙었다.
홍수환은 적지에서 '11전 11승 11KO'를 기록 중이던 강적 카라스키야를 상대로 고전했다. 2라운드에만 4차례 다운당했을 때, 한국에서 마음을 졸이며 TV를 지켜보던 국민도 패배를 예감했다.
그러나 홍수환은 거짓말 같은 투지로 일어났다. 3라운드에 몸통 공격으로 카라스키야를 조금씩 무너뜨렸고, 왼손 훅으로 기적 같은 KO승을 따냈다.
복싱계에 전무후무한 '4전 5기' 신화가 탄생한 순간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지난해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복싱 체육관에서 17년 만에 재회했던 홍수환과 카라스키야는 27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4전 5기' 홍수환 40주년 기념행사에서 다시 만났다.
작년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 초청으로 방한한 카라스키야가 먼저 홍 회장을 찾았다면, 올해는 홍 회장이 직접 초대해 자리가 마련됐다.
홍수환은 "카라스키야를 먼저 칭찬해야 할 것 같다. 만약 제가 졌다면, 파나마까지 40주년 기념행사에 안 갈 것 같다. 카라스키야는 제게 졌으면서도 한국까지 온 것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고 자리에 앉은 카라스키야에게 눈인사를 했다.
이어 "카라스키야 덕분에 먹고 산다. 제가 40년 전 일방적으로 이겼어도 (국민은) 저를 잊었을 것"이라고 홍수환이 '고해성사'를 하니 폭소가 터졌다.
이 자리에는 홍수환의 현역 선수 시절 가장 큰 조력자였던 장재식(82) 전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참석했다.
홍수환은 "당시 국세청 차장이셨던 장재식 장관님이 김포공항에 배웅 나와 '꼭 옆구리 공격을 잊지 말라'고 가르쳐주셨다. 그 옆구리 공격으로 세계 챔피언이 됐다. 오늘 장재식 장관님과 카라스키야의 포옹이 제 인생 가장 흐뭇한 순간"이라고 떠올렸다.
홍수환과 경기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카라스키야는 '4전 5기'를 당한 뒤 선수로 내리막을 걸었다.
대신 그는 정계에 투신해 파나마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이며, 차기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된다.
홍수환은 "카라스키야가 파나마 대통령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년에는 41주년을 맞아 파나마로 가겠다"고 약속했다.
'아름다운 패자' 카라스키야는 노련한 정치인답게 40년 전 자신이 다운당하는 영상이 나와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홍수환에게 져서 파나마에서 광고도 찍고 돈도 벌었다. 그리고 그 경기를 통해 친구가 생겼고, 잃어버린 형을 찾았다. 결국, 그날 진 게 패배는 아닌 셈"이라며 미소 지었다.
4bu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