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한 어머니 젖가슴 닮은 별식
"맛있는 빵에 기분도 빵 터지네!"
(횡성=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어느덧 한파 몰아치는 한겨울이다. 바깥세상을 내다보니 하얀 눈이 산비탈을 안온하게 덮고 있다. 빵집 주방에선 은색의 대형 찜솥이 하얀 김을 모락모락 피워올린다. 그 안에선 역시 새하얀 빵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보들보들 차지게 쪄지고 있다. 온통 백색의 향연! 모습을 바라만 봐도, 냄새를 맡아만 봐도 금방 침이 꿀꺽 넘어간다. 그리고 따스한 정감에 푹 빠져든다. 앙증맞은 한 덩이 안흥찐빵은 이렇게 세상에 태어나고 있었다.
찐빵 하나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심산유곡의 이 조그마한 면 소재지에 가면 거리 곳곳에서 '찐빵'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빵집 간판은 물론이려니와 정자, 공원, 마을 등 곳곳이 '찐빵'이라는 이름을 내세운다. 찐빵 없는 안흥을 상상할 수 없다 싶을 만큼 찐빵은 이 고장의 대표적 홍보대사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안흥면사무소 앞의 길 건너편에 있는 아담한 찐빵 소공원에 가보자. 여기에는 찐빵과 관련된 조형물과 캐릭터, 시비 등이 줄줄이 서 있다. 익살꾸러기 표정의 찐빵 인형은 바라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오고, 찐빵 이야기의 주인공인 도깨비 삼형제 역시 귀여운 포즈로 손님을 맞는다.
이곳의 시비에 적힌 시구가 뭉클한 감회를 안겨준다.
"찐빵에서 삶의 향수를 느낀다 / 찐빵 모습에서 / 어머니 젖가슴을 떠올린다 / 어머니의 젖과 같은 까만 앙꼬 단맛에 / 모든 시름 잊고 마냥 행복하다"
맛있는 음식과 포근한 모성애를 하나로 엮어 감성 깊게 담아낸 글귀다. 찐빵은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의 온기와 향수를 담고 있는 서민의 식품이다.
◇ 안흥이 찐빵 본고장 된 내력
그렇다면 심심산골의 오지인 안흥이 어떻게 찐빵의 본고장이 됐을까? 인구 3천여 명의 면 소재지에 20여 곳의 빵집이 성업하게 된 배경과 과정이 궁금하다. 이를 알려면 역사·지리적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흥은 서울과 강릉을 잇는 국도 42호선이 지나는 고장으로, 그 한가운데쯤에 위치한다. 예부터 대관령을 넘어 한양과 서울로 가는 영동의 길손들이 이곳에 들러 점심을 먹거나 간식을 챙겼다. 안흥은 그 중간 기착지였던 셈이다.
쌀이 부족해 먹고 살기 힘들던 1960년대에 밀가루는 끼니를 때우는 데 요긴한 식량이었다. 이곳 주민들은 막걸리를 숙성시킬 때 쓰는 효모균을 밀가루 반죽에 넣어 찐빵을 만들어 먹곤 했다. 물론 지나가던 길손들에게도 허기와 출출함을 잊게 하는 별미의 먹거리가 돼줬다.
하지만 당시에 찐빵은 다른 지역에서도 고만고만하다 싶을 만큼 흔했다. '안흥찐빵'이라는 독보적 고유명사를 획득하기엔 아직 일렀던 것. 거기다 1970년대에 영동고속도로가 뻥 뚫리면서 길손이 많이 줄어들어 안흥은 한때 침체기를 맞아야 했다. 안흥을 경유하지 않고 서울~강릉을 곧장 오가는 바람에 찐빵을 찾는 발길이 뜸해졌던 것이다.
현존하는 찐빵집의 원조는 안흥면사무소 앞에 있는 '면사무소앞안흥찐빵'. 이 빵집의 대표인 남옥윤(68) 할머니는 1985년 처음 문을 열어 오늘날까지 33년 동안 전통제조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빵에 손대기 시작한 건 그보다 훨씬 이전인 열여덟 살 때부터예요. 고생고생했지. 지금의 빵집을 내고 난 뒤 입소문이 나면서 인근 군부대에서 수백 개씩 주문을 받기도 했어요."
현재는 몸이 불편해 아들 김성순(45) 씨에게 가게 운영을 맡기고 있는 남 할머니는 지난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심순녀(72) 할머니가 운영하는 '심순녀안흥찐빵'도 안흥찐빵의 명가로 알려져 있다. 남 할머니와 자매 사이인 심 할머니는 2000년대 들어 지금의 빵집을 냈으나 젊어서는 동생인 남 할머니와 안흥면사무소 앞에서 빵을 빚었다고 한다.
현재 안흥면에는 이들 빵집을 비롯해 20여 곳이 운영되고 있다. 이 가운데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손으로만 찐빵을 만들어내는 전통방식의 손찐방집은 11곳이다. 1990년대에 언론매체에 대거 소개되고 나라가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로 들어가는 외환위기에 빠지면서 저렴한 서민음식인 안흥찐빵의 인기가 더욱 치솟아 한때 36곳의 빵집이 성업했다고 한다.
◇ 밀가루·팥소가 빚어내는 손맛 이중주
손으로 빵을 직접 빚는 손찐빵집에 들어서면 오붓한 정감이 먼저 느껴진다. 밀가루 반죽을 해 빵 성형을 하고 팥소를 넣어 숙성시킨 뒤 찜솥에 넣어 쪄내는 과정 하나하나에 섬세한 손길이 가기 때문. 빵을 빚는 종업원은 60대 이상의 할머니들이 많은데, 살아온 인생담과 세상 얘기를 허물없이 나누다 보면 온갖 시름을 말끔히 잊게 된다고 한다.
김성순 씨는 "우리 업소에는 다섯 분의 할머님들이 일을 도와주시고 계시는데 10년 이상 함께 지내오셔서인지 모두가 가족처럼 친숙하고 포근하게 느껴진다"면서 "찐빵이 사랑받는 비결은 '이모님'들의 순박하신 마음이 담긴 손맛에 있다"고 들려줬다.
이곳에서 21년째 빵을 만들고 있다는 진순섭(65) 할머니는 "우리가 정성스럽게 만든 빵을 손님들이 맛있게 드셔주실 때 가장 행복해요"라며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흥찐방에는 밀가루와 팥을 비롯해 달걀, 소금, 생효모, 마가린, 포도당, 설탕 등이 기본재료로 사용된다. 밀가루는 대개 호주산을 쓰되 팥은 국산을 고수한다. 밀가루, 달걀, 설탕, 소금으로 반죽해 1시간가량 따스한 온돌방에 펼쳐 1차 숙성시킨 다음 검붉은 팥소를 넣어 빵 성형을 하게 되고, 이어 1시간 30분 정도 2차 숙성을 한다.
이 과정에서 빵은 본래보다 2배 안팎 크기로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데 요리사들은 이를 '(잠자던) 빵이 일어난다'고 표현했다. 일어난 빵은 20~30분의 표면건조 과정을 거친 뒤 솥에 넣어 약 20분 동안 찌게 된다. 모두 3시간 30분가량의 수작업 제조과정을 거치면 색과 맛이 일품인 먹음직한 찐빵으로 태어난다.
안흥찐빵의 핵심 중 하나인 팥의 재료와 조리과정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단다. 빵이 달지 않으면서도 구수·담백한 맛을 부드럽게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팥소를 그때그때 만들어 쓰되 이 고장에서 나온 팥만 사용해서라고 요리사들은 귀띔한다. 이렇게 만든 팥소에는 방부제를 일절 넣지 않아 본연의 맛을 속 깊게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지극정성의 안흥찐빵은 은근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감칠맛을 품고 있어 애호가들로부터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회사 출장 다녀오는 길에 빵집에 잠시 들렀다는 이용인(43·수원) 씨는 "언제나 변함없이 편안한 맛에 끌려 근처를 지날 때마다 한두 박스씩 사간다"며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이 좋아해 더 만족스럽다"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대전에서 온 김영래(60) 씨도 "질 좋은 국내산 통팥을 써서인지 식감이 매우 친근하게 느껴진다"며 "맛있는 찐빵을 부담 없는 가격에 즐길 수 있어 만족감이 한결 큰 것 같다"고 말했다.
손찐빵은 20개 기준으로 1만1천원선이다.
◇ '도깨비 삼형제' 이야기 담은 축제
안흥찐빵은 이 지역에 전해오는 도깨비 삼형제 이야기와 절묘하게 결합돼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장난꾸러기 도깨비 삼형제가 안흥의 옛 지명인 실미에서 강림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도깨비불을 들고서 길손의 먹거리를 빼앗아 먹곤 했다. 이에 팥이 귀신에게 해롭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이 고장 현감은 길손들에게 술떡 안에 팥을 넣어 다니라고 일러줬다.
도깨비들은 이런 사실도 모른 채 평상시처럼 팥이 든 찐빵을 행인에게서 빼앗아 먹고는 금방 바위로 변해버렸다. 도깨비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그때부터 아무 걱정 없이 고개를 넘나들 수 있게 됐다고. 지명 또한 실미를 버리고 '편안함이 절로 인다'는 뜻의 안흥(安興)으로 바꿔 부르게 된 연유다. 이는 안흥면사무소 앞의 찐빵소공원에 도깨비 삼형제 모형이 놓인 까닭이기도 하다.
도깨비들이 장난치던 옛 실미~강림 길거리에는 경사로의 착시현상을 느끼게 하는 도깨비 도로가 나 있어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실제로는 오르막길이나 시각적으론 내리막길처럼 보이는 기묘한 느낌의 언덕길 바로 옆의 주천강변에는 이 고장의 관광명소인 삼형제바위가 보란 듯 우뚝 솟아 있다.
이 같은 전설과 찐빵을 바탕으로 매년 가을이면 국내 유일의 찐빵축제가 열려 거리를 흥청거리게 한다.
11회째를 맞은 2017안흥찐방축제는 '찐한 추억, 빵 터지는 재미'라는 주제로 10월 13일부터 사흘간 관광객 8만여 명을 불러들이고 손찐빵 1만5천 상자 판매 기록을 세웠다.
남홍순 2017안흥찐빵축제위원장은 "면민 화합과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했다"며 "인기를 얻은 '빵양' 캐릭터에 이어 내년에는 '팥군'이라는 캐릭터를 추가로 등장시키는 등 축제 성공과 발전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횡성군청은 안흥리 일원에 국비와 지방비 70억원가량을 투입해 1만8천㎡(약 5천400평) 규모의 안흥찐빵 홍보 공원인 '모락모락마을'을 2020년까지 조성할 계획이다. 찐빵명품관, 찐빵감성테마공원, 모락모락랜드마크 시설 등으로 이뤄질 이 공원은 안흥찐빵의 위상을 한 단계 더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id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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