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공격·하대·무시·침묵케 하는 구조와 문화를 바꿔야"
전·현직 대사, 외교관과 공직자 200여 명 공동서명 공개서한 발표
(서울=연합뉴스) 윤동영 기자 = 전 세계로 번지고 있는 '미투(#MeToo) 운동(각종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의 '나도 당했다'는 폭로·고발 운동)'의 발원지인 미국에선 그동안 언론보도에 많이 오르내린 할리우드, 실리콘 밸리, 보도국, 의회뿐 아니라 안보·외교·국방 분야로도 이 운동이 확산하고 있다.
이 분야의 특성상 대중에 널리 알려진 유명인이 등장하지 않고 구체적인 성폭력 피해 사례를 폭로하는 방식은 아니어서 대중의 이목을 끌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전·현직 대사를 비롯한 외교관들과 다른 외교·안보·국방 분야 인사 223명이 "우리 역시 성적 괴롭힘, 공격, 학대로부터 '생존자'들이자 다른 사람들이 당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며 공동 서명한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보복의 두려움 없이 신고할 수 있는 복수의 기밀 통로 설치 ▲외부의 독립적 기구를 통한 사례 수집과 익명 발표 ▲모든 종사자에 대한 정기 훈련의 의무화 ▲연방 공직을 떠나는 모든 여성을 대상으로 사유를 조사하는 퇴직자 면접 시행 등을 촉구했다.
이튿날 외교·안보 전문 매체 포린 폴리시에는 로자 브룩스 조지타운대 법학 교수는 "'미투'는 국가안보 분야에서도 너무나 흔한 일"이라며 자신이 국방부와 국무부에서 일할 때 직접 겪었으나 "그동안 기억에서 편집해 잘라냈던" 일들을 소개했다.
지금까지 미투 운동이 주로 피해자들의 폭로와 고발이었다면, 지난 8일 "나는 힐러리 클린턴의 외교정책 최고 고문이었다. 미투는 내 탓이기도 하다"고 고백한 제이크 설리번 예일 법과 대학원 객원교수의 포린 폴리시 기고는 남성 입장에서 쓴 반성문이다.
그는 자신이 직장에서 성 평등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생각했었으나, 이제 보니 여성들을 위협하고 해치고 있던 수많은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점을 자책하면서 '미투'에 나선 여성들을 응원했다.
반성문을 쓴 이유에 대해 그는 모든 뉴스가 그렇듯 '미투'도 조만간 잦아들어 "앞으로 수년 후 주위를 둘러보면 변한 게 아무것도 없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변화가 올 때까지 이 문제를 직시할 것"을 촉구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성폭력을 가능케 하는 "무시무시한 힘의 깊이와 너비"를 자신이 놓친 것은 "여성들이 감히 신고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선택하는 길밖에" 없는 사회 구조와 문화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개인적 책임을 모면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면서 국가안보 분야에서 성차별 문제의 핵심은 진입 기회의 문제로만 봤고, 그래서 이 분야에 들어서는 여성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점점 개선되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론 진입 장벽 이상의 큰 문제로 "대문에 들어선 뒤에도 여성들은 마치 장애물 코스처럼 여성들만 겪어야 하는 다른 문들과 지뢰에 맞닥뜨리고 그것들을 거치면서 상처와 고통을 받고 일그러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지?"라고 여성 동료들에게 물으니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고 그는 전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지?"라고 묻는 게 올바른 질문이라는 것이다.
브룩스 교수도 "종국엔, 남성 여러분이 바뀌어야 바뀐다"고 지적했다.
브룩스 교수는 공개서한 서명 요청을 받고 처음엔 "나는 성폭력 피해를 당하고도 살아남은 생존자가 아닌데"라는 생각에서 망설였다.
남성들로 들어찬 회의실에서 유일한 여성일 때도 자주 있었고 그래서 동등한 동료로 인정받으려면 더 열심히, 더 영리하게 일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낀 적은 종종 있지만 대체로 나쁜 일을 당하지 않고 성공적이고 행복한 공직 생활을 했다는 기억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투 운동에 대한 연대 의식에서 서명하고 나니 그동안 기억에서 지워졌던 일들이 떠올랐다. 국방부에 신입 신고를 할 때 별 둘을 단 장군이 주위를 돌아보며 "(여성인) 미셸 플러노이 차관 아래에서 좋은 점이 뭔지 아나? 섹시한 여자애들(hot babes)로 펜타곤을 채운다는 것이지"라고 말했다는 것.
"나는 아마 못 들은 척 했던 것 같다. 돌아보니 못 들은 척 한 일들이 많았다. 가는 귀를 먹는 게 남성 클럽 가입에 필요했던 것이다"
브룩스 교수는 국무부에서 코소보 등지를 출장 다닐 때 믿고 따르던 유부남 고참이 어느 날 베니스 운하 길에서 술에 취해 성폭행하려고 달려드는 것을 간신히 떼어내 운하로 쳐넣은 일도 있다.
이 모든 일을 정말 잊고 있었던 것은 "잊을 수 있을 만큼 너무나 정상적인 일들로 생각했었기 때문"이라고 브룩스 교수는 분석했다. "부적절한 언사와 술에 취한 채 가하는 성적 공격 행위들은 그저 모든 여성이 직장에서 만나기 마련인 일들"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기억에서 편집됐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비로소 화가 나기 시작했다고 브룩스 교수는 토로했다.
그는 "미투 운동의 그 모든 트윗과 글들의 요체는 바로 이 점"이라며 "어떻게 해서 우리는 명명백백한 직장 성폭력에 대해서까지, 피해자마저도, '으레 그런 것'이라고 간주하는 세상을 '정상적'인 것으로 보게 됐느냐"고 분노했다.
그는 "남성의 저열한 행태 중 단순히 불쾌한 언사와 범죄에 해당하는 행동은 구별돼야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괜찮지는 않다"면서 "이런 남성의 행태가 국가안보 분야에서 여성들을 쫓아내는 요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이는 직장에서 승진하거나 그저 그만두지만은 않으려 해도 남성에 비해 여성들을 힘들게 만드는, 여성들에게만 부과되는 추가 요금, 또는 세금이라는 것이다.
외교·안보·국방 분야 미투 운동 공개서한은 "우리 분야 정부 기관들에는 유능한 여성들이 남성들과 거의 같은 숫자로 들어오지만…고위 직급엔 여성이 30% 미만"이라고 지적했다.
서한은 "이 분야에서 많은 여성이, 불균등한 힘을 사용해 여성들을 공격하거나 여성들을 침묵시키고 비천하게 대우하고 얕잡아 보고 무시하는 환경을 영구화하는 남성들에 의해 억제를 당하거나 쫓겨난다"며 "이제 이를 중단시킬 때"라고 강조했다.
yd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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