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 3집 '피트의 눈물' 발표한 싱어송라이터
(서울=연합뉴스) 박수윤 기자 = "인생에서 이기는 건 소수의 몇 프로일 뿐, 대부분은 져요. 패배는 평범한 것이고, 우리 대부분은 우울을 안고 살지 않나요?"
싱어송라이터 고상지(34)는 역경을 딛고 끝내 성취해내는 할리우드식 영웅 서사가 불편하다고 했다. 늘 해피엔딩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거리는 '다 잘 될 거야'를 속삭이는 음악, 영화, 자기계발서로 가득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던 소녀, 카이스트를 중퇴한 학생, 탱고에 매료돼 아르헨티나로 훌쩍 떠나 반도네온(손풍금) 연주자가 돼 돌아온 여인.
그의 독특한 삶의 궤적과 시니컬한 대답을 따라갈수록 질문거리가 자꾸 불어났다. 12일 정규 3집 앨범 '피트의 눈물'(Tears of Pitou)을 발표한 고상지를 최근 종로구 수송동에서 인터뷰했다.
음반명이 예사롭지 않아 그 뜻을 묻자 고상지는 "일본 애니메이션 '헌터×헌터'의 악당 캐릭터 '피트'에서 따왔다"며 웃었다.
"이번 앨범의 메시지는 '투지'와 '기합'이에요. 살다 보면 이리 채이고 저리 채여서 분노를 느끼게 되잖아요. 그럴 때 배경음악이 돼주는 거죠. 절대 응원곡은 아니에요. 다만, 질 걸 알면서도 '으악!' 하고 기합을 넣고 싶을 때 투지를 북돋워 줄 음악이죠."
'마지막 만담', '무한의 유피', '성층권', '제빵사의 아침', '99.082%' 등 독특한 제목의 10곡이 담긴 이번 앨범은 '헌터×헌터'를 비롯해 '톱을 노려라', '원펀맨', '파이널 판타지' 등 일본 애니메이션을 향한 존경과 애정을 짙게 담았다.
반도네온 연주자로 이름을 알린 그이지만, 정작 3집에서는 음울하고도 매혹적인 반도네온의 음색을 찾기는 힘들다. 정교한 오케스트레이션의 향연 속에 슬쩍슬쩍 양념처럼 얹어질 뿐이다.
고상지는 1집에서 반도네온의 비중이 60%였고, 2집은 오롯이 반도네온 연주곡만 담았다면 3집의 주인공은 반도네온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애초에 반도네온이 제 정체성이 아니거든요. 처음 관심 있던 건 피아노였어요. 그런데 곡을 써서 가요제에 나가도 성적이 안 좋았어요. 우연히 반도네온을 하니까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주더라고요. '이 악기를 한다면 음악으로 먹고살 수 있겠다' 싶었죠. 이번 음반은 그저 일본 게임 음악을 뿌리에 두고 탱고 작곡법을 쓴, 제가 하고 싶던 이야기예요."
그는 인터뷰 내내 애니메이션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으며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였다. 어릴 적 TV로 본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아벨 탐험대', '드래곤 퀘스트'가 영혼을 살찌우는 젖줄이었고, '에반게리온'은 음악관을 형성하는 기둥이 됐다.
오마주가 표절로 흐를 수 있다는 두려움은 없었을까. 그는 명쾌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탱고 황제'로 불리는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를 정말 좋아하는 데요. 최근에 바로크 음악을 공부하다 보니 피아졸라의 음악 중에 바흐에서 따온 게 정말 많더라고요. '드래곤 퀘스트'는 바로크 작곡가 텔레만과 코드 진행이 비슷하고요. 그렇다고 피아졸라와 바흐가, 드래곤 퀘스트와 텔레만이 같지는 않죠. 영감을 얻어 창조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고상지는 세션으로도 명성이 높다. 2011년 MBC '무한도전'에 출연하며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진 뒤 연주요청이 급증했다고 한다. 작년에만 김창완밴드의 싱글 '시간', 정미조의 컴백앨범 '37년', 고(故) 김광석의 20주기 추모 앨범 '김광석, 다시' 등에 세션으로 참여했다.
찾아주는 곳이 많다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바쁜 생활에 아쉬움도 커졌다. 그래서 내년에는 연주자로서의 얼굴을 한 꺼풀 내려놓기로 했다. 내년 1월 6일 서강대학교 메리홀에서 신년음악회 '어드벤처 2018'을 연 뒤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질 계획이다.
"3집을 준비하면서 너무 힘들었거든요. 완벽주의적인 성격이라 여러 연주자, 믹싱 엔지니어를 많이 괴롭혔어요. 내년에는 작곡가로서 바로크 시대 음악과 오케스트레이션을 본격적으로 공부해보려고요. 공부는 스스로만 괴롭히면 되잖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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