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선언 뒤 중동 내 반미 정서 최고조
중동 3강 이란·사우디·터키, 역내 패권 경쟁 '삼국지'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중동에서는 '정권이 친미이면 국민은 반미, 정권이 반미이면 국민은 친미다'라는 속설이 있다.
중동 대부분 국가가 군주정이거나 절차적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탓에 정권과 민심이 이반됐다는 점을 단순화해 설명하는 말이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예루살렘 선언'은 이 속설을 무색게 했다.
중동 이슬람권의 정권과 시중 여론이 모두 '반미'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은 그렇지 않아도 탄압받는 무슬림, 억압받는 아랍계의 상징이었다.
이 때문에 중동이 이해득실에 따라 피아로 구분되지만 팔레스타인 문제만은 정치, 정서적으로 이론을 제기할 수 없는 '절대 명제'였다.
이교도인 유대인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는 곧 자신을 형제로 칭하는 이슬람 공동체를 향한 순수성의 척도였다.
트럼프 대통령의 예루살렘 선언으로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팔레스타인의 이런 위치가 가장 극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중동에서 이견이 있었던 팔레스타인의 대(對)이스라엘 무력 투쟁마저 옹호되는 분위기다.
팔레스타인은 중동 이슬람 국가의 신앙심과 종교적 선명성을 측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됐다.
중동 각국은 앞다퉈 더 강력하고 자극적인 반미, 반이스라엘 발언을 쏟아내면서 이슬람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증명하고 있다.
비록 말뿐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중동 이슬람권이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은 부인할 수 없는 터다.
향후 종교적 주도권이 걸린 이 경쟁에서 가장 선두에 선 나라는 이란과 터키다.
양측 모두 중동 정세에 영향이 큰 강국이기도 하지만 혈통이 아랍계가 아니라는 점도 자못 관심을 끈다.
이란은 예루살렘 선언 이후 팔레스타인 무력 투쟁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 거셈 솔레이마니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이 잇따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무장정파 하마스의 지도부와 통화했고 이 사실을 언론을 통해 공개했다.
예루살렘 선언을 비판하는 국제 여론도 이란엔 호재다.
로하니 대통령은 12일 "알쿠드스(예루살렘의 아랍어 명칭)는 전 세계 모든 무슬림의 소유이고 알아크사 사원(예루살렘 성전산의 이슬람 사원)은 무슬림이 가장 먼저 향해야 할 키블라(무슬림이 기도할 때 바라보는 성지의 방향)다"라면서 종교적 의미를 강조했다.
키블라는 이슬람 최고 성지인 사우디의 메카와 메디나를 칭한다.
아울러 경쟁국 사우디아라비아를 궁지에 몰 기회를 잡은 모양새다.
'대이란 공동전선'을 위한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밀약설을 엮어 '사우디가 팔레스타인을 포기했다'는 공세를 펴고 있다.
터키도 '팔레스타인 수호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13일 이스탄불에서 열린 이슬람협력기구(OIC) 긴급회의에서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에 점령된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인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난해 6월 양국 국교가 6년 만에 겨우 정상화된 이스라엘을 '테러 국가'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내가 OIC 회원국을 초청했다"면서 "이슬람 국가는 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수도로 공인해야 한다는 요청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아랍계는 아니지만, 이번 예루살렘 사태를 계기로 중동 이슬람권의 주도국으로 부상하려는 야심을 선명하게 드러낸 셈이다.
이슬람 종주국 사우디는 오히려 이번 국면에서 수세에 몰렸다.
9일 아랍연맹 외무장관 회의를 긴급 소집해 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인정해야 한다는 성명을 내긴 했지만, 이란과 터키와 비교하면 직접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사우디의 실세 왕자 모하마드 빈살만 왕세자와 트럼프 대통령의 유대계 사위 재러드 쿠슈너의 친분이 부각되면서 예루살렘 선언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게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고 있다.
살만 사우디 국왕은 아랍 이슬람권의 또 다른 정신적 지도국인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을 12일 리야드로 긴급히 불렀다.
이슬람 창시자 모하마드의 후손인 요르단 왕실은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한 예루살렘의 수호자로 인식되는 탓에 이번 예루살렘 선언으로 위상에 타격을 입었다.
사우디 국영매체는 "두 국왕은 미국의 결정으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갈등, 중동의 안보와 안정이 더 복잡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팔레스타인 국민의 역사적이고 확고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아랍과 이슬람권이 협력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고 보도했다.
중동 패권을 두고 '삼국지'를 벌이는 이란과 터키의 반응과 비교하면 원론적이고 유화적인 외교적 제스처로 보인다.
hskan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