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휘두른 흉기에 죽은 충주 인터넷 수리기사…허망한 '을'의 현실
중소도시 응급환자에겐 북한 귀순병사 기적은 없다
(충주=연합뉴스) 김형우 기자 = 지난 6월 16일 오후 갑작스럽게 울린 휴대전화 한 통이 그녀의 삶을 순식간에 봐꿔놨다.
"아빠가 돌아가셨대. 어서 병원으로 와" 믿기 힘든 이야기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인터넷을 점검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찾아간 원룸에서 고객이 휘두른 흉기에 목숨을 잃은 인터넷 수리기사 A(52)씨의 딸(23)은 그렇게 사랑하는 아빠와 예고조차 없었던 작별을 고해야 했다.
"아침에도 저를 학교까지 바래다준 아빠였는데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니 믿어지지 않았어요. 그날 이후 저를 비롯한 우리 가족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딸은 당시를 회상하며 다시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아빠의 죽음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6개월이 지났지만, 딸의 시간은 그대로 멈춰져 있다. 예기치 않게 보낸 아빠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떨려오고 말문이 막힌다.
지금도 자상하고 따뜻한 아빠를 무자비하게 살해한 권모(55)씨를 이해할 수가 없다.
"아빠는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비극이 벌어진 그날도 A씨는 평소처럼 고객의 부름을 받고 일터로 향했다.
충주시의 한 원룸으로 찾아간 그는 도착하자마자 고객 권씨가 쏟아내는 불만을 들어야 했다.
모니터 2대를 차려놓고 사이버 주식 거래를 해온 권씨는 당시 인터넷 업체에 불만이 쌓여있는 상태였다.
인터넷 속도가 느려 주식 투자에서 손해를 봤고 급기야 이 업체가 자신의 컴퓨터에 칩을 심어 고의로 속도를 떨어뜨린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애초부터 권씨가 화풀이의 '대상'으로 A씨를 점찍고, 범행을 준비했을 가능성을 검찰이 염두에 둔 이유다.
실제 권씨는 A씨가 집안으로 들어온 뒤 채 몇 분도 안 돼 소지했던 흉기를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난데없이 고객이 휘두른 흉기에 목과 배를 찔린 A씨는 가까스로 원룸 밖으로 빠져나왔다.
피투성이가 된 A씨는 주위에 도움을 요청했고 119구급대에 의해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숨졌다.
아내와 80대 노모, 대학에 다니는 2명의 자녀 등 단란한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며 살아온 평범한 가장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날 그가 한 '잘못'이라곤 고객의 부름을 받고 성실히 일터로 향했다는 것밖에 없다.
이 사건은 최근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질의 횡포와 맥이 닿아있다.
인터넷 수리기사는 고객의 평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대표적인 서비스직이다.
고객의 요구는 기사들에게는 '법'이나 다름없다. 계약직이나 파견직 등 고용이 불안정한 신분에 놓인 경우는 고객의 평가로 일자리 보존 여부가 갈리는 경우가 많다.
고객이 싫은 소리를 하거나 때리더라도 웃고 참을 수밖에 없는 정신적·육체적 '을'의 신세가 된다.
언제나 갑의 횡포에 변변히 저항조차 못한 채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슬픈 현실은 통계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노동·시민단체들의 모임인 '기술서비스 간접고용 노동자 권리보장과 진짜 사장재벌책임 공동행동'이 지난 7월 인터넷·케이블방송·가전제품 방문설치 수리기사 796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서다.
응답자 10명 중 7명꼴인 77.1%(614명)가 '고객의 폭언·폭행으로 안전과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도 아직도 많은 수의 인터넷 기사들은 위험에 노출된 채 업무를 이어가고 있다.
A씨의 죽음은 지방 중소도시의 열악한 응급의료체계를 되돌아보는 계기도 됐다.
지난달 22일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귀순하다가 총상을 입은 북한 군인이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에서 이국종 교수의 치료를 받고 기적처럼 의식을 되찾아 국민적 관심과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지방 중소도시에선 열악한 응급의료체계 탓에 북한 군인처럼 기적적인 상황을 기대하기 어렵다.
권씨가 휘두른 흉기를 피해 건물 밖으로 빠져나온 A씨는 곧바로 119구급대에 의해 인근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지역에선 규모가 큰 대학병원이었지만 안타깝게도 A씨와 같은 응급환자를 치료할 전문 의료인력이 없었다.
결국 A씨는 헬기로 권역외상센터가 있는 원주의 세브란스기독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출혈이 너무 심해 목숨을 잃었다.
인구 22만명인 충주에서 제대로 된 응급처치도 받지 못해 이송 도중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지역사회에서는 열악한 의료시스템이 성실한 가장을 두 번 죽였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에 따라 시는 취약한 응급의료체계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고 중장기적인 해결책을 논의하기 위해 유관기관 회의를 열었다.
시 관계자는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지역 응급의료체계 개선이 시급하다는 인식에 따라 중장기적으로 닥터 헬기 전용 이착륙장 확보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씨는 지난달 2일 청주지법 충주지원에서 열린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vodcast@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