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T 오염' 땅인 줄 모르고 닭 풀어키워…좌절딛고 재도전
"처음부터 검사했으면 대처했을 것…억울하지만 새 출발"
(영양=연합뉴스) 손대성 기자 =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쏟아지는 찬사도 넘치는 자신감도 뚜렷한 미래설계도 사라졌다.
무엇보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닭과 달걀이 한순간에 없어졌다.
이몽희(55)씨에게 2017년 8월 21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아침부터 공무원, 기자, 지인 등에게서 전화가 빗발쳤다.
경북 영천에 있는 이씨 농장 달걀에서 DDT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디클로로디페닐트라클로로에탄 성분이 나왔다는 정부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농장에 DDT는커녕 살충제, 제초제 한 번 뿌린 적 없다고 했다.
이씨는 2007년부터 영천에 터를 잡고 닭 8천500마리를 키우며 달걀을 생산했다.
8천500마리 가운데 6천마리가 산란계다. 나머지는 산란계가 되기 전인 병아리다.
좁은 닭장에서 빽빽하게 키우는 일반 밀식 산란계 농장과 달리 흙 바닥에서 닭을 풀어놓고 키웠다.
일반 산란계 농장은 주변에 가면 역한 냄새가 나기 마련이나 이씨 농장은 냄새가 별로 나지 않았다.
충분한 여유 공간에서 친환경 방법으로 키우다가 보니 흔히 말하는 생산성은 일반 산란계보다 떨어졌다.
일반 산란계는 달걀 생산성이 85∼90%다. 쉽게 말해 하루에 일반 산란계 100마리 가운데 85∼90마리가 알을 낳을 정도다.
그러나 재래종 닭은 100마리 가운데 30마리가량 알을 낳아 생산성이 30%에 그친다.
이씨 농장에서 산란계 6천마리가 하루에 낳는 달걀은 약 2천개. 이 가운데 선별을 거치면 상품화할 수 있는 것은 1천900여개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재래종 닭이 좋고 친환경으로 키우는 것이 좋아서 10년 정도 꾸준히 도전했다.
이런 노력을 소비자가 먼저 알아줬다.
한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 달걀을 믿고 구매했다.
일반 달걀은 1개에 200원 정도에 출하하지만 이 농장의 것은 750원에 팔렸다. 그것도 늘 물량이 달렸다.
전국에 친환경 인증을 받은 달걀은 많으나 이처럼 재래종 닭으로 친환경 인증을 받은 달걀은 이씨 농장을 포함해 전국에 2곳뿐이라고 한다.
물론 소규모로 재래종 닭을 키우는 곳도 있으나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춰 유통한 곳은 드물었다.
그 덕분에 축사를 마련하느라 진 빚을 갚았기에 농업으로도 돈을 벌 수 있겠다 싶었다고 한다.
경북 청송 출신인 그는 대학 다닐 때 집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손가락을 다쳐 농사와 인연을 끊으려고 했다.
영남대 축산학과를 졸업한 그는 회사에 취직해 중국 내몽고와 러시아 연해주에서 농장 개발업무를 맡았다.
그러면서 생각을 바꿔 직장을 그만두고 후배와 축사를 전문으로 짓는 건설업을 했다.
곧이어 건설회사를 후배에게 맡기고 노후를 대비해 재래종 닭을 키우는 일을 시작했다.
관련 업계에선 알아주는 농장을 일궜으나 살충제 달걀 파동은 그를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정부가 조사한 결과 농장 흙에서 DDT 성분이 나왔다. DDT는 과거 농경지에서 살충제로 광범위하게 쓰였으나 1970년대 생산과 판매를 전면 중단한 약품이다.
이에 따라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원래 이씨 농장은 다른 사람이 운영하던 복숭아 과수원이었다.
이로 미뤄 과수원을 하던 사람이 오래전에 뿌린 DDT가 흙에 남았을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이씨와 정부는 DDT가 남은 땅에서 닭이 흙 목욕을 하거나 체내에 흡수하면서 DDT 성분이 달걀로 옮아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결국 그는 지난 8월 24일 모든 닭과 달걀을 폐기 처분하고 농장 문을 닫았다.
그가 잘못한 점이라면 의도하지 않게 DDT 성분이 남은 땅에서 닭 농장을 했다는 것뿐이다.
살충제 달걀 파동 초기엔 청와대, 농림축산식품부, 농촌진흥청 등이 연락해 "선의의 피해자니 최대한 도와주겠다"고 했다고 이씨는 주장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기관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보상금 한 푼 주는 곳이 없다.
오로지 그가 모든 책임을 떠안았을 뿐이다.
"처음부터 DDT까지 농약 성분을 검사했으면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그동안 정부가 전혀 검사하지 않아 몰랐습니다. 달걀을 믿고 먹은 소비자에게 우선 미안합니다. 나도 땅이 오염돼 있을 줄 몰랐습니다. 그런 면에서 참으로 억울합니다. 낚싯배 사고엔 정부가 무한책임이라고 말하고도 왜 이런 일에는 입을 싹 닫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씨의 눈에 핏발이 섰다.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살충제 달걀 파동과 무관하게 그는 지인 7명과 함께 농업법인을 만들어 4년 전부터 재래닭연구소를 만들 준비를 해 온 터였다.
영천 농장은 자기가 그대로 운영하고 재래닭연구소는 공동으로 할 계획이었으나 살충제 달걀 파동으로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그는 지금 영양의 한 산골짜기에서 새로운 닭 농장과 재래닭연구소를 만들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곳에 허가가 난 날이 지난 8월 중순으로 살충제 달걀 파동이 터지기 며칠 전이었다.
이달 19일 축사 신축 현장에서 만난 이씨는 찬 바람을 맞으며 부지런히 현장을 오가며 작업 지시를 내렸다.
현장을 함께 둘러보며 "이곳엔 닭 농장, 저곳엔 닭연구소를 지을 계획"이라고 말할 때는 얼핏 웃음기도 보였다.
농사를 지어도 평생 가난하게 사는 구조를 바꾸고 싶고 농업이 제조업과 함께 국가 산업에 기본이란 지론을 증명하고 싶다고 했다.
"재래닭이 옛날부터 좋더라고요. 우리 재래종 닭을 복원한다는 자부심도 있고, 이게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축사 형태나 닭 관리 방법이라든지 모든 것에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자신이 있습니다. 지금도 어서 달걀을 달라는 곳도 있고요. 내년 2월부터는 새로 출발하려고 합니다. 지켜봐 주이소."
sds123@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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