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개막…"신여성 다룬 첫 시각문화 기획전"
김은호 '미인승무도'·박래현 '예술해부괘도' 등 미공개 22점 공개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단정한 양장 차림에 악기 가방을 든 여성이 거리를 걷는다. "아따 그 계집애 건방지다. 저것을 누가 데려가나." 갓 쓴 두 양반이 '계집애'를 손가락질한다. 반대편에 선 젊은이도 평을 보탠다. "맵시가 동동 뜨는구나. 쳐다나 보아야 인사나 좀 해보지."
서울 중구 정동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장 벽면을 차지한 삽화다. 1920년 잡지 '신여자'에 실린 그림은 신여성을 경시하고, 또 그러면서도 선망했던 당대를 풍자한다. 신여성을 동물원 동물 대하듯 하는 제목 '저것이 무엇인고'도 눈길을 끈다.
삽화 작가는 나혜석(1896~1948)이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라는 수식어는 이혼고백서 발표, 행려병자로 마감한 인생 등의 스캔들에 가리기 일쑤다. 근대 지식과 문물, 이념을 삶에서 실현했던 신여성 대다수가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당대나 지금이나 논쟁과 주목의 대상인 신여성이라는 '현상'을 조명하는 대규모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21일 개막한다.
이번 전시는 신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첫 전시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강승완 학예연구실장은 20일 덕수궁관 기자간담회에서 "2000년 이후 신여성의 학문적인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으나 시각 예술 측면에서 고찰하는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전시에는 68명 작가의 작품 100여 점과 자료 400여 점이 나온다. 시대는 근대교육이 본격적으로 실시된 1890년대부터 일제강점기를 아우른다. 여성 작가뿐 아니라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남성 작가들의 작품도 포함했다.
회화와 조각, 자수, 사진, 표지화, 삽화, 포스터, 영화, 대중가요, 서적, 잡지, 딱지본 등 매체도 다양하다. 현존하는 신여성의 순수미술 작품이 극소수인 것도 주된 이유지만, 덕분에 다양한 방식으로 감상할 수 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여성 작가 41명의 작품 108점은 도록 슬라이드쇼로 대체했다. 한국전쟁 당시 대부분이 소실됐기 때문이다.
1부 '신여성 언파레-드'는 대중매체 등에서 재현한 '신여성' 이미지를 소개한다. 당대 신여성이라는 '현상'이 어떠한 긴장과 갈등을 일으켰는지 보여준다.
2부 '내가 그림이요 그림이 내가 되어'는 국내 남성 작가들을 사사한 정찬영·이현옥, 기생작가 김능해·원금홍, 도쿄 여자미술학교 출신인 나혜석, 나상윤, 박래현, 천경자 등의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을 한데 모았다. 창작자로서 자각했던 초창기 여성 작가들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다.
나혜석(미술), 김명순(문학), 주세죽(여성운동), 최승희(무용), 이난영(대중음악) 등 다섯 선각자를 재조명하는 3부 '그녀가 그들의 운명이다'가 마지막 순서다. 현대 여성 작가들이 이들을 오마주한 신작을 다양한 사료와 함께 감상할 수 있다.
강 학예실장은 "신여성 현상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큰 사회변동 중 하나"라면서 "남성 중심 서사에서 벗어나 새롭게 여성 통해서 한국 근대성을 바라보자는 취지로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띄는 작품은 2부에 전시된 자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도쿄 여자미술학교(현 조시비미대) 자수과에서 공부했던 여성들의 작품을 20점 가까이 대여해 전시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해방 이후 자수가 미술 영역에서 배제됨에 따라 수많은 여자미술학교 출신들의 자수 관련 활동들이 근대미술사에서 누락됐다는 것은 근대기 한국미술의 또다른 이면"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플로리다대학 한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김은호 '미인승무도'(1922), 조시비미대 소장의 박래현 '예술해부괘도(1) 전신골격'(1940) 등 국내 미공개작들도 처음 만나볼 수 있는 자리다.
개막식이 열리는 20일 오후 4시에는 가수 하림이 참여하는 공연 '신여성 노래하다'가 진행된다.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안종화 감독·1934)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김태용 감독의 변사도 내년 1월 6일 서울관에서 펼쳐진다.
전시는 내년 4월 1일까지. 관람료는 3천 원. 문의 ☎ 02-2022-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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