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문화예술계가 격동의 한해를 보냈다.
벽두부터 지난 정부 실세들을 줄줄이 구속시키며 정국을 요동치게 했던 블랙리스트의 격랑이 문화예술계를 들이쳤다.
새 정부가 출범하고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에 문화예술인들이 참여하는 민관합동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끔찍한 악몽으로 막을 내린 전 정부의 '문화융성' 정책의 실패를 바로잡고 그늘을 지우느라 동분서주하는 사이 1년이 지나갔다.
관련 의혹들의 진상이 속속 드러나는 가운데 블랙리스트에 올라 정부 지원이 중단됐던 예술가나 단체들이 하나둘 복권되고 축소·폐지됐던 지원사업도 복구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과거의 잘못을 규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화와 예술이 간섭받지 않고 마음껏 살아 움직일 수 있는 토양을 조성하는 일이 당면 과제로 주어졌다.
새해부터 본격화될 새로운 문화정책의 비전으로 정부는 '사람이 있는 문화'를 제시했다.
◇ 창조를 위한 파괴…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전말을 밝히고 재발을 방지할 제도를 마련하고자 지난 7월 말 발족한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는 2천670건의 피해 사례를 확인했다며 지난주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피해 사례는 특검과 감사원이 밝힌 400여 건을 크게 웃돌았다. 피해를 본 문화예술인은 1천12명, 단체는 320개에 달한다.
조사 도중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부터 이뤄진 블랙리스트 작성·실행의 구체적 정황이 드러났다. 이뿐 아니라 소문만 무성했던 이명박 정부 시절의 문화예술인 사찰과 탄압 사실이 국가정보원에 의해 사실로 밝혀지면서 공분을 샀다. 이로 인해 당초 박근혜 정부를 표적으로 했던 조사 대상 시기가 이명박 정부까지 약 10년간으로 늘어났다.
진상조사위는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단 내년 1월 말까지인 운영 기간을 한 차례 연장해 내년 4월 말까지 활동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진상조사위의 기본 운영기간은 6개월이지만 필요할 경우 3개월씩 연장할 수 있다.
21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진상조사위는 피해사례 조사 외에 관련 제도의 개선 방안 마련과 블랙리스트 백서 발간도 추진한다.
◇ 블랙리스트 예술인 지원 재개…축소·폐지 사업 복구
블랙리스트에 올라 정부 지원에서 배제됐던 문화예술인과 공연에 대한 지원이 재개됐다. '블랙리스트 1호'로 불리는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희곡 '꽃을 바치는 시간'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오페라 지원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2천만원의 지원을 받아 오페라 작품 제작에 들어갔다. 내년 4월 쇼케이스 실연 심사를 통과하면 1억5천만~2억8천만원의 제작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지난달 문예위가 공개한 '공연예술 창작산실' 지원작에는 앞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정부 지원을 받지 못했던 극단 하땅세, 놀땅, 백수광부의 작품이 포함됐다.
해외행사참가 지원 등에서 배제됐던 블랙리스트 문인 안도현, 천양희 시인, 김애란 소설가는 지난달 한국문학번역원의 초청으로 터키 이스탄불국제도서전에 참가했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정부 지원이 끊겼던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와 대관 지원을 받지 못했던 서울연극제도 다시 지원대상에 포함됐다.
부당하게 폐지·축소됐던 문화예술지원사업들도 일부 복구됐고 새해에는 원상 복구된다. 정부와 국회는 이를 위해 총 104억3천만원 규모 내년도 예산안을 마련해 승인했다.
'우수문예지 발간지원사업'은 내년 10억원의 예산이 배정돼 근 2년 만에 과거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이 사업은 올해 지원 예산이 아예 책정되지 않았다가 새 정부 출범 후 뒤늦게 체육기금에서 5억원을 긴급 투입해 명맥을 이었다.
문학작품에 창작 지원금을 주는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은 지난해부터 2년 동안 3억원 이하로 줄었던 예산이 내년에 다시 10억원으로 늘어난다.
소극장을 지원하는 '특성화극장 지원사업'도 10억5천만원의 내년 예산이 편성돼 제 궤도에 오른다. 공연예술단체들에 대관료를 지원하는 '공연장 대관료 지원사업'은 33억원의 예산이 정식으로 책정됐고, '국제영화제 지원사업'은 40억8천만원의 예산을 배정받았다.
방치돼 바닥을 드러낸 문화예술진흥기금도 새해부터 복권기금과 국고 지원을 받아 확충된다.
◇ 블랙리스트 멍에 벗고 '사람이 있는 문화'로
문체부는 나라 전체를 멍들게 한 국정농단 사태와 블랙리스트로 인해 직격탄을 맞았다. 김종덕, 조윤선, 정관주, 김종 등 전직 장·차관 4명이 구속됐고, 현직 실·국장 등 19명의 직원이 감사원의 징계 요구를 받았다.
초유의 위기를 맞은 문체부는 사활을 건 조직쇄신에 나섰다.
처음 블랙리스트 규명에 데 앞장선 도종환 시인이 문체부 장관을 맡고, 박근혜 정부 인사 전횡의 대표적인 피해자인 노태강 전 체육국장이 차관으로 발탁됐다. 조직을 7실에서 4실 5국 체제로 축소 개편하고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를 단행했다.
'문화융성'이란 화려한 수사 뒤에서 부정부패가 난무한 전 정부의 문화정책을 바로 세우기 위한 작업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대규모 문화시설 조성사업인 문화창조융합벨트는 국정농단의 대표 사례로 지목되면서 해체됐다.
대신 국민이 일상에서 문화예술을 즐기는 생활문화, 예술인의 생존과 창작을 보장하는 예술인 복지, 문화예술에 대한 간섭을 차단하는 공정한 문화행정이 새로운 문화정책 목표가 됐다.
블랙리스트 사건의 재발을 막는 문화기본법 개정안이 지난달 국회를 통과했지만, 문체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예술가들을 정치적 압력과 검열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새해 제정될 '예술가 권익보장법'에는 예술의 자유를 침해할 경우 처벌하는 조항이 담긴다.
새해부터는 생계유지가 어려운 예술인들을 위해 긴급한 생활비나 의료비를 지원해주는 '예술인 복지금고'를 조성하고, 실업급여 혜택을 제공하는 '예술인 고용보험제도'를 2019년 도입하기 위한 준비도 착수한다.
도종환 장관은 내년 3월까지 수립할 새 문화정책의 비전인 '사람이 있는 문화'에 "새로운 사회와 나라를 외쳤던 사람들의 열망과 블랙리스트로 국민의 문화 창작·향유권을 침해한 국가에 대한 반성이 담겼다"고 말했다.
abullap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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