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악한 난방에 화재 빈발, 숙소 설치기준 없어
(부산=연합뉴스) 차근호 기자 = 베트남인 아버지는 두 살 된 딸을 고국에 남겨두고 외국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지난 15일 오전 1시 49분 베트남인 노동자 N(35) 씨가 잠을 자고 있던 컨테이너에서 갑자기 불이 났다.
컨테이너는 부산의 한 공장 안에 만들어진 외국인 기숙사다. 벽돌 건물 화장실 위에 컨테이너를 얹어 임시로 만든 시설이다.
낮에는 직원 숙소로, 밤에는 N씨가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임시 시설인 탓에 보일러는 없었다.
겨울이면 칼바람이 스며들어 전기장판, 라디에이터 없이는 눈 붙이기조차 힘들다.
이날 화재로 컨테이너는 완전 잿더미로 변했다.
이 탓에 화재 원인을 정확히 밝히지는 못했지만 N씨가 쓰던 난방기구 과열 등 전기적 문제로 불이 난 것으로 경찰과 소방본부는 추정하고 있다.
미처 대피할 시간도 없이 N 씨는 이날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N 씨는 이번이 세 번째로 한국땅을 밟은 것이었다.
2006년 산업연수생으로 처음 입국했다.
기간이 만료돼 출국한 뒤 두번째는 정식 취업비자(E9)로 들어와 일했다.
취업비자를 한번 받으면 국내에서 최장 4년 10개월간 일할 수 있다.
그 기간 N 씨는 '성실 근로자'로 분류됐다.
덕분에 비자가 만료되고 베트남으로 돌아가 일정 기간이 지난 뒤 다시 한국에 입국할 자격을 받을 수 있었다.
N 씨는 지난해 부산의 한 제조 공장에 취업했다. N 씨의 베트남인 아내도 N 씨를 따라 한국에 들어와 충남지역 제조 공장에 취업했다.
부부는 한국땅에서 헤어져 살면서도 '코리안 드림'을 이뤄 귀국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두 살배기 어린 딸은 어쩔 수 없이 베트남에 남겨둔 채였다.
아내는 지난 20일 남편의 주검을 닷새 만에 수습해 고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어린 딸에게 엄마마저 잃게 할 수 없어 어렵게 받은 국내 취업 기회를 포기한다는 뜻도 내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한파가 몰아치면서 컨테이너, 비닐하우스 임시숙소 등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화마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N씨가 숨지고 바로 나흘 뒤인 지난 19일 새벽에도 부산 강서구의 한 외국인 기숙사로 쓰는 컨테이너 건물에서 불이 났다.
당시 잠을 자던 러시아 노동자는 급히 대피해 목숨은 건졌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이주노동자 주거권 개선 네트워크에 따르면 지난 2월 7일 인천의 한 공장 컨테이너 외국인 근로자 대기실에서도 불이 났고, 1월 17일 경기 광주시 가구공장 외국인 숙소에서 불이 나기도 했다.
이주노동자 주거권 개선 네트워크의 한 관계자는 "이주노동자가 가건물, 비닐하우스 등 난방시설 없는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살면서 추위를 막으려고 전기장판이나 라디에이터를 계속 틀어놓다가 참사를 당한 사건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면서 "소방시설은커녕 소화기조차 마련되지 않은 불법 무허가 건축물에서 화재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고 이런 주거환경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열악한 기숙사가 방치되는 이유는 법적 기준 미비 탓이다.
근로기준법 제100조는 '근로자의 건강, 생명 유지에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기숙사의 구조나 위생, 안전 등의 설비에 대해서는 전혀 규정하고 있지 않다.
고용노동부의 한 관계자는 "외국인 근로자가 열악한 환경에 사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법적 기준이 없어 사실상 단속은 어렵고 행정지도를 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용득 의원은 근로자 기숙사 설치 기준을 구체화한 근로기준법과 외국인고용법 개정안을 지난 9월 발의한 상태다.
이주노동자 주거권 개선 네트워크 측은 "외국인 노동자에게 노동을 마치고 편히 쉴 수 있는 '사람의 집'을 제공하라"며 개정안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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