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선수로 유일하게 발롱도르·FI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으로 28일(현지시간) 당선된 조지 웨아(51)는 그야말로 아프리카의 전설적인 축구 스타였다.
유럽의 명문 구단에서 활약하고 국제축구연맹(FIFA) 올해의 선수와 최고 축구 선수에게 수여되는 발롱도르를 거머쥔 '축구선수 웨아'는 '정치인 웨아' 못지않은 성공을 누렸다.
웨아는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의 빈민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프로 축구선수로 유럽에 건너가기 전엔 한때 통신회사에서 배전 기술자로 일하기도 했다.
국내 축구리그에서 공격수로 활약하며 두각을 나타낸 웨아가 처음으로 유럽에 진출한 것은 1988년이었다.
당시 프랑스 AS모나코 감독이던 아르센 벵거 아스널 감독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영입했다.
그는 1992년까지 모나코에서 뛰며 103경기에 출전해 47골을 넣었다.
1989년 올해의 아프리카 축구선수상을 받았고, 라이베리아 전역에서 그의 수상을 대대적으로 기념했다.
1991년에는 모나코를 프랑스 FA컵인 쿠프 드 프랑스 정상에도 올려놓았다.
1992년에 모나코에서 파리 생제르맹(PSG)으로 유니폼을 바꿔입은 후부터 웨아는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빠르고 힘 있는 플레이로 '흑표범'이라는 별명을 얻은 웨아의 활약으로 PSG는 1993년, 1995년 쿠프 드 프랑스에서 우승하고, 1994년 프랑스 리그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웨아는 1994-1995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다. 1994년의 아프리카 축구선수상도 그의 차지가 됐다.
1995년에는 이탈리아로 무대를 옮겨 AC밀란에서 활약을 이어갔다.
PSG와 AC밀란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그는 1995년 축구선수 최고의 영예인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을 거머쥐었다.
현재까지도 이 두 상을 받은 아프리카 선수는 웨아가 유일하다.
AC밀란에서 2000년까지 114경기에 출전해 46골을 넣은 웨아는 2000년 잉글랜드로 넘어와 첼시와 맨체스터 시티에서 짧지만 성공적인 활약을 펼쳤다.
이후 프랑스 마르세유와 아랍에미리트(UAE) 알자지라를 거쳐 2003년 37살의 나이로 은퇴했다.
클럽에서는 눈부신 성과를 이뤄낸 웨아지만 라이베리아를 월드컵 본선에 진출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선수에 감독 역할까지 하며 사재를 털어 대표팀을 끌어오던 웨아는 2002년 한일월드컵 예선에서 사상 첫 본선 진출 꿈이 좌절된 후 팬들의 비난 속에 2001년 대표팀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가 찰스 테일러 대통령의 간곡한 만류로 돌아오기도 했으나 대통령과의 불화 속에 이듬해 다시 대표팀과 결별했다.
당시 "정권 변화가 없는 한 결코 조국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으로 떠났던 웨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적인 야망을 드러냈다.
2004년 귀국해 2005년 대권 도전을 선언했고 결선 투표에서 엘런 존슨 설리프 전 대통령에 패해 고배를 마신 데 이어 2011년 선거에서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나갔다가 또다시 낙선했다.
2014년 상원의원으로 당선되며 대권의 꿈을 붙잡고 있던 웨아는 마침내 라이베리아에서 73년 만에 처음으로 민주적인 정권교체를 이뤄낸 주인공이 되며, 정치인으로서도 가장 높은 곳에 오르게 됐다.
mihy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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