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출범 후 도로점거·천막농성 등 '우려 상황' 이어져
"불법시위 지양" 제언…"정부·기업이 NGO·노조 의견 반영해야" 반론도
(서울=연합뉴스) 이효석 기자 = "한국의 촛불집회는 민주주의와 법치에 대한 시민들의 의지를 모범적인 방식으로 드러냈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민주적 참여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세웠습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치 재단인 에버트재단이 지난해 재단 인권상에 한국의 '촛불 시민'을 선정하며 밝힌 이유다.
2016년 10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총 23차례 열린 박근혜 정권 퇴진 요구 촛불집회는 하루 최대 232만명·연인원 약 1천700만명(주최 측 추산·전국 기준)의 대규모 인원이 운집했지만, 수개월 간 충돌 없이 평화적으로 열려 세계적 관심을 모았다.
이처럼 평화 촛불집회로 주목받은 지 몇 달 만에 도로점거 등 불법 사례가 생기면서 집회·시위 양태가 과거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됐다.
집회·시위를 바라보는 시민의 시각이 달라진 만큼 정밀한 법률적 준비를 거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새로운 형식의 홍보로 주장을 알리는 것이 여론의 호응을 얻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조언이 나온다.
그러나 통상적인 방식으로는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아 위법행위를 통해서라도 관심을 끌어야 하는 이들의 절박함을 이해해야 한다는 지적도 여전하다.
◇ 노력 끝에 일군 '평화 집회'…새 정부 출범 후 일부서 '균열'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서도 충돌이나 위법행위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초반인 3차 집회까지는 경찰 차벽을 밀거나 경찰 버스 위에 올라타는 등 물리력 행사가 종종 눈에 띄었다. 경찰과 몸싸움 끝에 연행된 참가자도 있었다.
다만 광장에 나온 시민 스스로 촛불집회를 평화적으로 만들었다는 점이 과거와 달랐다.
소위 '짱돌 좀 던진' 운동권 세대가 "차벽을 밀자"고 하면, 평소 정치에 관심이 없다가도 국정농단 사태에 분노해 거리로 나온 10∼20대가 "불법 시위는 안 된다"고 말렸다.
이들은 '거리 토론'까지 벌였다. "불법을 저지르면 우리가 비판하는 세력과 다를 게 없다"는 젊은 세대의 요구를 기성세대가 결국 받아들였다. 이후 촛불집회는 평화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새 정부가 출범하고 시민들이 광장을 떠나 일상으로 돌아가자 과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은 집회·시위 풍경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지난해 6월 20일 새 정부 출범 후 첫 청와대 행진을 진행한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건설노조) 조합원 8천여명은 임금·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면서 광화문∼청운효자동 일대를 행진했다. 일대 교통은 수십 분간 거의 마비 지경에 이르렀다.
건설노조는 지난해 11월 28일에는 건설근로자법 개정을 요구하며 약 2만명이 퇴근 시간대 마포대교 남단 도로를 점거해 극심한 교통 혼잡을 야기했다. 노조 간부들은 여의2교 광고탑 등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방한한 지난해 11월 7일에는 광화문 광장을 반미(反美) 단체 회원 1천여명이 점거했다. 이들은 트럼프 대통령 차량 행렬이 지나갈 때 물병과 형광봉 등을 던졌다.
광화문 광장 주변과 청와대 입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인근에서는 새 정부 출범 후 매일같이 민원성 시위와 천막 농성이 이어졌다. 인근 주민들이 "집회·시위 소리 때문에 못 살겠다"며 자제를 호소하는 침묵시위를 벌일 정도였다.
◇ '새로운 시위' 지향 요구…정부·기업도 NGO·노조와 협의 필요
건설노조의 마포대교 점거와 반미단체의 트럼프 대통령 반대 시위는 진보진영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조차 "전통적 방식의 시위는 이제 시민 공감을 살 수 없다"는 자성을 불러오게 하는 계기가 됐다.
한 30대 사회활동가는 "촛불집회를 보고 사회문제에 관심이 생겨서 작년 퀴어 퍼레이드에 참가했다는 20∼30대가 많은데, 왜 참가했냐고 물어보면 '재밌잖아요'라고 답한다"면서 "'분노'를 '풍자'로 승화시키는 축제 방식의 시위를 기획해야 시민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단체나 노조가 정부·기업의 잘못을 지적할 때 무조건 거리 시위를 벌일 게 아니라, 법률 전문성을 키워서 치밀하게 대응을 해야 한다는 제언도 있다.
촛불집회 당시 경찰이 집회·행진을 제한하자 참여연대가 논리적인 법률대응으로 법원의 청와대 앞 촛불 행진 허용을 끌어낸 사례, 기아자동차 노조가 법률사무소 새날과 함께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한 법원 판결을 끌어낸 사례 등이 선례로 꼽힌다.
시민사회단체의 대(對) 정부·기업 비판이나 노조의 파업 이유를 알리는 홍보활동은 SNS·유튜브 등 온라인 콘텐츠를 더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실제로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조는 허지웅 작가, 배우 권해효·박철민씨 등이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필요성을 쉽게 설명하는 영상으로 네티즌 사이에서 "민주노총이 이런 콘텐츠를 만들다니 새롭다"는 반응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단체·노조 관계자들은 온라인 홍보활동 같은 '단순 캠페인'으로는 정부 기관과 기업의 변화를 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고, 불법·무력시위를 하지 않으면 여론 관심을 받지 못하는 측면도 있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건설노조의 한 관계자는 "작년 11월 마포대교 점거 시위를 감행하기 전에 촛불집회를 몇 차례 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면서 "정부 관계자나 국회의원들도 노숙농성 정도는 벌여야 찾아온다"고 토로했다.
그는 "우리나라 여론은 아직 노동자 문제에 대한 관심이 옅다"면서 "전체 노동자를 위한 사안으로 시위를 벌여도 '민주노총'이라고만 하면 부정적 반응이 나오는 상황에서, 자본에 맞서려면 처벌을 감수하는 시위로라도 여론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집회·시위·파업이 최소화하도록 정부와 기업이 의사결정 구조에 비정부기구(NGO)나 노동조합 의견을 반영하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유럽 선진국은 의회에서 주요 의사결정을 할 때 경총·노총 등 여러 이익단체가 참여하는 싱크탱크를 통해 협의를 거치는 것이 일상화해 시위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면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떤 절차를 거쳐 사회적 합의를 이뤄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조언했다.
hy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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