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가로수길'엔 뜨는 카페와 34년차 이발관이 나란히

입력 2018-01-06 08:00  

'터키의 가로수길'엔 뜨는 카페와 34년차 이발관이 나란히
이스탄불 니샨타시으 뒷골목…재산권보다 영업권 보장해 거리 생태계 유지




(이스탄불=연합뉴스) 하채림 특파원 = 터키 이스탄불의 '명품 거리' 니샨타시으는 서울로 치면 청담동쯤 된다. 해외 유명 브랜드와 디자이너 상점이 몰려 있고, 길가엔 고급 수입차가 즐비하다.
브랜드 거리를 조금 벗어나 테시위키예 사원에 가까워지면 개성 있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로 꾸민 카페와 레스토랑, 갤러리, 부티크(의상실), 소품점이 좁은 길을 따라 이어진다.
'순수 박물관',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을 비롯한 오르한 파무크의 여러 소설이 이곳을 배경으로 쓰였다.
저녁 시간대와 주말이면 세련된 이스탄불의 젊은이들과 동네 토박이들로 붐비고, 여행자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한국인, 서울시민이라면 당장 가로수길이 떠오르는 곳이다.



테시위키예 사원 주변의 카페 거리와, 한국의 가로수길·경리단길은 비슷한 인상이어도 곧 차이점이 눈에 들어온다.
니샨타시으 카페 거리에는 카페, 부티크, 갤러리만 있는 게 아니라 오래된 이발관과 미용실, 유제품 가게가 공존한다.
사원 바로 뒷편 '아흐메트 페트가리 샛길'(Ahmet Fetgari Sk.)에 있는 이발관 '쿠아푀르 사데틴'(헤어드레서 사데틴)은 1985년부터 34년째 이 거리를 지켰다.
이발관 내부의 세라믹·대리석 집기는 오래됐지만 새것처럼 윤이 나고, 벽에는 예술가와 지망생 손님들이 선물한 작품과 장식품으로 빈틈이 없다.



이발관 업주 '헤어디자이너' 사데틴 첼리크지오을루(63)씨는 유명한 터키 화가와 음악가, 학자들의 이름을 줄줄이 읊으며 "이제는 그 자녀들이 머리를 다듬으러 온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기다리는 손님이 앉는 소파 탁자에 놓인 사진첩에는 첼리크지오을루씨와 단골들, 니샨타시의 역사가 차곡차곡 쌓였다.
그의 가게 자랑은 끝이 없다.
"기자 양반처럼 지나가다 우리 가게를 보고는 그냥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얼마 전에도 독일 기자들이 와서 사진을 찍어 갔어"
첼리크지오을루씨의 이발관말고도 근처 미용실 '쿠아푀르 사데틴 앤드 시난', 유제품과 올리브 절임 등 전통식품을 파는 식료품점, 양품점 같은 오래된 가게들이 추억과 향수를 일으키고, 거리에 생기와 감수성을 불어넣는다.
거리 어디선가 '순수 박물관'의 연인 퓌순과 케말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뜨는 길'이 되면 임대료가 치솟아 원주민이 떠나고 천편일률적이고 상업적인 구역으로 변하는 현상, '젠트리피케이션'은 한국 대도시의 공통적인 고민거리다.
가로수길과 경리단길이 고만고만한 카페와 주얼리숍, 부티크로 개성을 잃었지만 니샨타시는 과거를 몰아내지 않았다.
헤어드레서 사데틴은 어떻게 폭등하는 가겟세를 부담하며 34년째 이곳을 지킬 수 있었을까.
첼리크지오을루씨가 세든 공간의 임대료는 시세로 1만터키리라(약 300만원)가 훨씬 넘지만, 그는 건물주에게 5천리라 정도 낸다.
임차인 보호법령에 따라 그가 영업을 계속하기를 원한다면 건물주가 내보내기 매우 어렵고, 계약을 갱신할 때 임대표 인상폭도 제한돼 있다.
한국사회의 관점으로 보면 건물주로서는 재산권 제한으로 인식할 수 있으나, 터키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는 대체로 이런 보호장치가 옳다는 사회적 합의가 오래전부터 지켜졌다.
이런 제약이 단기적으로는 손해로 여겨질지라도 거리 '생태계', 달리 말해 상권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옛 이웃들이 하나둘 떠나고 카페와 핸드백숍으로 바뀌는 현실이 속상하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첼리크오을루씨는 고개를 저었다.
"새 카페들이 들어오는 거 저는 나쁘지 않게 봅니다. 젊은이들이 많이 오니 거리가 활기에 넘치잖아요. 우리 이발관은 좀 비싸도 실력과 서비스가 최고니까, 고객이 끊어질 일도 없고요. 허허허"
34년 니샨타시으 터줏대감의 웃음소리가 5일(현지시간) 주말을 맞아 설렘과 경쾌함으로 소란한 밤 거리로 퍼져나갔다.


tre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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