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엔 중국 비단·제주 생선도 거래…시골장으로 번성
6·25전쟁 후 쇠락했다가 복원된 후 대형화재 이기고 재개장
(하동=연합뉴스) 지성호 기자 =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19대 대통령 선거운동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는 영남·호남 공동선대위 발족식을 경남 하동군 화개장터에서 하려 했다.
앞선 18대 대선 정국에서도 무산되기는 했지만 당시 집권여당 새누리당 대통합위원회가 화개장터에서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가 참석한 김장 하기 행사를 주최하려 했다.
왜 화개장터일까. 무엇보다 화개장터의 정치적 상징성이 국내 어떤 곳보다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대권을 꿈꾸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화개장터를 찾곤 한다.
18대 대선 열기가 고조될 무렵인 2012년 7월, 민주당 후보로 부상하기 시작한 김두관 전 경남지사가 이곳을 찾아 전의를 다졌는가 하면, 2016년 8월에는 집권여당 대표 출신으로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고는 소위 '민생투어'에 나선 김무성 의원 역시 이곳을 주요한 탐방지 중 한 곳으로 삼았다.
화개장터가 지닌 상징성, 특히 영·호남 화합의 장이라는 정치적 상징성은 어느 때보다 커졌다.
하동군 섬진강 변의 어느 이름없는 마을이 어찌하여 이렇게 드라마틱한 변모를 겪고 있는 것일까.
◇ 조선 시대 생긴 장터…중국 비단·제주 생선도 거래
화개장터는 옛 화개장(花開場)이 열린 터 인근에 하동군이 복원한 일종의 재래시장이다. 영남과 호남 경계를 이루는 섬진강 변에 있다.
그 서쪽으로 2003년 준공한 남도대교를 건너면 전남 구례군 간전면 운천리에 닿는다. 남쪽으로 국도를 따라 2∼3분 달리면 전남 광양시 다압면 하천리가 나온다.
화개장이 언제부터 열렸는지 확실하지 않다. 매달 1일과 6일 오일장이 열린 흔적만은 확인된다.
화개장 기록은 1603년(선조 36년) 전라좌도섬진진지도(全羅左道蟾津鎭地圖)에 나타난다. 나루 이름인 섬진진은 지금의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에 있었다. 회화적 기법을 살려 섬진진과 주변의 모습을 묘사한 이 지도는 섬진강을 따라 이어진 장시의 발달을 보여준다.
영남과 호남 접경에 있는 화개장, 소설 '토지'의 무대인 악양동(岳陽洞) 장시, 그리고 하류 지역 장시 등이 표시돼 있다.
1770년 편찬된 동국문헌비고를 보면 '하동에는 화개장(1·6일) 등 4곳에 시골장이 서고 있다'란 대목이 있다.
이곳은 전북 남원과 경북 상주 상인들까지 모이고 중국 비단과 제주도 생선까지 거래되는 등 규모가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후기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도 하동에 속한 두 개 고읍(古邑) 중 하나로 악양과 함께 소개돼 있다.
경상대 고문헌도서관이 소장한 조선 후기 지방지도에는 탑촌(塔村)으로 등장한다. 이 동네 옛 우체국 자리에는 지금도 통일신라 시대 삼층석탑이 있으니, 아마 이 탑에서 유래한 명칭인 듯하다.
주변에는 '봉상사'라는 사찰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 "오고 가는 객주 끊이지 않았다"…2001년 장터 복원
김동리는 근대기 화개장터 모습을 단편소설 '역마'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도라지·두릅·고사리들이 화개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화물 장수들의 실·바늘·면경·가위·허리끈·주머니 끈·족집게들이 또한 구롓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의 해물 장수들의 김·미역·청각·명태·자반조기·자반고등어 등이 들어오곤 하여 산협(山峽)치고는 꽤 은성(殷盛·번화하고 풍성하다)한 장이 서기도 하였으나…"
하지만 6·25전쟁 이후 어물전과 난전, 비단가게 등 화개장의 옛 모습은 사라졌다. 장터에는 섬진강에서 나는 은어와 참게 등을 요리해 파는 음식점만 즐비했다. 다만 화개장터 앞 기념비에 적힌 다음과 같은 글귀가 번성했던 화개장 모습을 전할 뿐이다.
"섬진강이 수문을 연 이래 영남과 호남을 잇던 이곳에 삼한 시대에 화개관이라 불린 요새가 장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726년 번성기를 맞아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시장이 되었고 객주의 오고 감이 끊이지 않았다."
하동군은 2001년 옛 화개장터 앞 화개천 건너편 농지에 장터를 복원하고, 상설 관광형 시장으로 개장했다. 그 뒤 2014년 11월 27일 새벽 2시 30분에 난 불로 장터 내 전체 점포 80개 가운데 41개와 보관 중인 약재 등이 잿더미가 되는 큰 재난이 있었다.
화재 소식을 들은 하동군 출향인들은 물론 전남 광양시 공무원들도 하루빨리 복구해 개장이 이뤄지도록 십시일반 성금을 보탰다. 당시 하동군에는 3억2천400만원이 모였다. 섬진강을 사이에 둔 이웃사촌 광양시 공무원 415만2천원과 광양시의회 50만원 등 광양시에서 800여만원을 모아 하동군에 기탁했다.
하동군은 정부교부세 5억원 등 총 25억원을 들여 한옥 구조의 장옥 등을 복원하고 2015년 4월 3일 재개장했다.
그 결과 화개장터는 다시 하동의 최고 관광지이자 영호남 화합의 장이 됐고, 연간 150여만명이 찾는 명소로 발전했다.
◇ 같은 제목 가요 한 곡, 장터 살린 결정적인 힘
화개장은 광복 후에도 오일장을 유지하다가 6·25전쟁 후 지리산 빨치산 토벌 과정에 산촌이 황폐해지면서 쇠락해 명맥만 유지했다.
그러다가 1988년 가수 조영남이 노래 '화개장터'를 발표하면서 장터는 아연 새 시대를 열기 시작한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 아랫마을 하동사람 윗마을 구례사람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이 노래는 한동안 조영남 작사·작곡으로 알려졌지만 가사는 김한길 전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가 쓴 것으로 밝혀졌다.
2009년 한 방송국 프로그램에 출연한 조영남은 이렇게 말했다.
"김한길이라고 있죠? 머리 하얀. 둘 다 백수일 때가 있었죠. 인기 폭락했을 때 그 친구도 미국서 살다가 바닥이 됐는데, 그 친구가 신문 쪽지를 내밀더니 '이걸 노래로 만들어야 한다' 더군요, 경상도, 전라도 구분 없이 사이좋은 화개장터에 대한 가사였어요."
"장터인데 무슨 노래가 되느냐고 했더니 '뜻이 있지 않으냐'고 했어요. '전라도와 경상도가 합치는'이라는 말이었죠. 그래서 '네가 글을 써봐라.'라고 했죠. 그 친구가 소설가니까. 둘이서 곡을 만들었다."
영호남 지역갈등이 첨예한 시기에 발표한 이 노래는 그 갈등을 적지 않게 해소하는 역할을 했다는 말을 듣는다.
이를 계기로 화개장터는 '화합'을 호소하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거듭났다.
영남과 호남의 인심을 동시에 맛보고 바구니 가득히 남도 물산으로 장도 보면서 잘못 조장된 갈등을 일상적인 삶으로 풀어보라고 바로 그곳, 화개장터가 지금도 손짓하고 있다.
shch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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