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의 이야기'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하루는 체전부(우편배달부)가 무엇을 가지고 왔다. 풀어 보니 사진이다. 그 사진은 미국 영지인 포와(하와이)에서 왔다. 이름은 길차옥 씨고 나이는 30여 세다. 사진혼인할 신랑의 사진이다."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0∼1920년대 한국에는 사진결혼이라는 독특한 혼인 방식이 존재했다. 사진결혼은 미국에 노동이민을 간 남성과 한국에 사는 여성이 사진을 교환한 뒤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을 지칭했다.
당시 사진결혼으로 미국에 건너간 여성은 대략 600∼1천 명으로 추산된다. 1896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천연희도 '사진신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15년 정월 남편을 만나기 위해 고향을 떠나 하와이로 향했다.
천연희는 훗날 출국 직전의 심정에 대해 "그때는 외국 갈 희망에 사랑이고 무엇이고 아무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고 자유의 나라에 갈 생각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신간 '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의 이야기'는 천연희가 1971년부터 1984년까지 공책 7권에 쓴 자전적 기록을 싣고, 이에 대한 해제를 덧붙인 책이다. 해제는 문옥표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 함한희 전북대 교수, 김점숙 명지대 교수, 김순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이 주제별로 집필했다.
천연희의 삶은 곡절이 많았다. 그는 하와이 마우이 섬에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도 세 명이나 낳았지만, 27세 연상인 남편은 술을 좋아하고 경제력이 없었다. 천연희는 두 번째 한국인 남편과도 자녀 교육 문제로 갈라섰고, 미국인 남성과 세 번째 결혼을 한 뒤에야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그는 자식을 모두 공립고등학교에 보냈고, 교통사고로 17세에 세상을 뜬 장녀를 제외한 5남매를 혼인시켰다. 한편으로는 한인 신문과 잡지를 읽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설립한 한인기독교회에도 열심히 다녔다.
이처럼 열정적으로 살았던 천연희는 1997년 하와이에서 101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그의 생애와 기록은 사진신부 연구뿐만 아니라 이민사와 여성사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이덕희 소장은 천연희 기록의 의의에 대해 "사진신부 가운데 자신의 이야기를 친필로 남긴 여성은 단 두 명밖에 없다"며 "한인 여성들이 일본인 여성과 달리 조그만 가게보다는 하숙집이나 여관을 운영하고자 했다는 점 등이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이 소장은 이어 "구한말 진주 방언과 한국어 단어가 사용됐고, 천연희가 들리는 대로 영어 단어를 표기했다는 점에서 언어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자료"라고 덧붙였다.
일조각. 888쪽. 5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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