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회색인간'·'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13일의 김남우' 동시 출간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아연 주물 공장에서 액세서리, 지퍼나 단추 같은 것들을 만들어온 노동자 김동식(33) 씨가 소설을 쓰는 작가로 거듭난 것은 한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서였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공유하는 커뮤니티로 유명한 '오늘의 유머'(일명 오유) 공포 게시판에 2016년 5월 어느 날 '복날은 간다'라는 아이디로 글이 하나 올라왔다. 짧은 분량의 기묘하고 독특한 이야기는 인간과 사회의 부조리를 집약적으로 담아 생각할 거리를 남겼고, 이용자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다. 이 커뮤니티에서는 추천 수가 100이 되면 일반 게시판에서 '베스트 오브 베스트'(베오베) 게시판으로 이동하는데, '복날은 간다'의 글들은 등록한 지 몇 시간 만에 베오베로 넘어갔다. 그는 금세 오유의 인기 작가가 됐고, 2∼3일에 한 편씩 이야기를 써내 1년 6개월 동안 무려 300여 편의 단편을 올렸다.
이 단편소설들이 이번에 3권의 소설집으로 정식 출간됐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의 임프린트 요다에서 '회색인간',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13일의 김남우'란 제목으로 펴냈다.
김동식 작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성수동의 한 아연 주물 공장에 취직해 10년 동안 일했다. 문학이나 소설, 글 쓰는 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그는 500℃ 넘는 뜨거운 아연을 큰 국자로 퍼내 주물에 붓는 일을 매일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한다. 그 고독한 시간 동안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1권 '회색인간'의 표제작인 '회색인간'은 그런 노동의 경험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그들에게 있어 문화란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인간이 노동으로 질식당하는 디스토피아 세계를 그린다.
어느 날 1만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땅속 세상 '지저 세계'에 납치돼 땅을 파는 노동을 강요당한다. "반기를 꿈꾸고 달려든 사람들은 지저 인간의 손끝조차 건드려보지 못하고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나간"다. 분노하고 저항하던 힘을 모두 소진한 사람들은 진흙 맛이 나는 말라비틀어진 빵으로 연명하며 무표정한 회색 얼굴로 하루하루를 억지로 살아간다. 땅 파는 일 외에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는 이곳에서 어느 날 한 여인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 여인은 쓸모없는 일을 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서 따귀를 맞고 돌팔매질을 당한다. 그런데도 또 한쪽에서는 한 남자가 벽에다 돌멩이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 남자 역시 몰매를 맞는다. 그리고 며칠 뒤 놀랍게도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는 여인에게 빵을 갖다 준다. 그림을 그린 화가 역시 한 노인에게서 빵을 받고 이곳의 지옥 같은 삶을 기록으로 남겨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런 변화 이후 여전히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굶주림에 시달리지만, 그들의 얼굴은 더는 회색이 아니다.
다른 소설 '아웃팅', '손가락이 여섯 개인 신인류', '디지털 고려장' 같은 작품들은 기술 발달로 인조인간, 가상 세계, 유전자 조작 등이 일상화된 세계를 그린 SF 성격의 이야기에 과학 기술 발달의 어두운 면과 인간 사회의 차별, 가족 해체 등의 문제를 다룬다.
각각의 이야기는 짧게 끝나지만, 한 편을 읽고 나면 또 다음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이상한 마력을 발휘한다. 그렇게 계속 이야기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아라비안나이트로 알려진, 끝나지 않는 이야기 '천일야화'가 떠오른다.
"인터넷에서 '글 쓰는 법'을 검색해 거기서 배운 대로 글을 써 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댓글에서 배운다"는 작가는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 바탕화면에 간직한 100여 개의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계속 써나갈 것이라고 한다.
mina@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