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의 세월 위로한 노래들…모국 연주무대 초대에 감격"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일본 강점기 압제를 피해 모국을 등져야 했고, 옛소련 시절에는 강제이주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뿔뿔이 흩어졌던 고려인을 위로한 건 우리 노래였습니다. 어디를 가든 불렀던 아리랑에는 지난 세월의 아픔과 위로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카자흐스탄 재즈 1세대 음악가이면서 고려극장 예술감독과 지휘자를 역임한 고려인 한야콥(75) 씨가 12∼13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열리는 다큐 콘서트 '아리랑 삶의 노래-흩어진 사람들2' 출연을 위해 방한했다.
창작활동을 통해 국악의 현대화를 선보여온 정가악회가 마련한 콘서트로, 그는 이 무대에서 자신이 작곡한 '고려아리랑' 연주를 지휘한다.
공연 리허설을 마친 한 씨는 11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50년 이상 음악가로 살면서 여러 나라에서 공연했지만 가장 감격스러운 게 모국 무대"라며 "강제이주 후 80년이 넘는 세월을 흘렀어도 민족성을 잃지 않도록 힘이 되어준 고려인의 아리랑을 소개하게 돼 무척 설레고 기쁘다"고 밝혔다.
고려인의 노래를 100곡 이상 작곡·편곡하며 민족노래 보존에 앞장서 온 그는 지난 2007년 '재소고려인의 노래를 찾아서 1, 2'를 발행하기도 했다. 3년간 러시아를 비롯한 CIS 전역의 고려인 거주지를 찾아다니며 아리랑을 비롯해 구전되어온 노래들을 채록해 복원한 책이다.
한 씨는 "민족의 유산이 될 수 있게 더 늦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자는 생각에서였다. 강제이주 첫 정착지인 우슈토베, 연해주, 사할린, 타슈켄트, 크즐오르다 등 가는 곳마다 반기며 노래를 불러주던 1세분들이 지금은 다 유명을 달리했다"며 "이 기록들은 자라나는 차세대들이 자신의 뿌리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연해주에 살던 그의 부모는 강제이주로 카자흐스탄 남부의 심켄트 황무지 지대에 정착했다. 늪지가 많아서 쓸모없는 땅을 개간해 벼농사를 짓고 목화를 재배했다.
콜호스(집단농장)에서 태어난 그가 농업인이 아닌 음악가로 길을 걷게 된 계기는 5살 때 우연히 접한 클래식 LP 음반과 러시아식 아코디언인 바얀 덕분이었다. 콜호스 행사 때마다 친형이 연주하는 바얀을 배우며 음악가의 꿈을 키운 그는 심켄트 음악학교와 심켄트 사범대에서 트롬본을 전공했다.
애초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려고 했던 그가 재즈로 눈을 돌린 건 대학 시절 극장에서 상영한 미국영화를 보면서다. 뮤지컬 영화로 당대 재즈 트롬본 연주가였던 글렌 밀러의 곡을 들으며 충격에 빠졌다.
일주일 상영 기간 수십 번 영화를 본 한 씨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재즈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재즈를 금기시하는 분위기여서 음반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투르크메니스탄 접경지대에서 3년간 군 생활을 하면서 그는 매일 라디오로 미국 재즈방송을 들었고 독학으로 재즈를 익혔다.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고려극장에 입단해 실력을 인정받으며 상임지휘자로 발탁된 그는 '아리랑' 앙상블을 만들었다. 이어 재즈와 아리랑을 접목한 곡을 선보였고 높은 호응을 얻으면서 현대 발레 음악, 재즈 등 연주 범위를 점차로 확대했다. 공연 때마다 절반은 고려인의 음악과 춤으로 무대를 꾸몄고 나머지는 소련음악(30%)과 재즈(20%)로 레퍼토리를 구성했다.
안 씨는 "흥겨우면서도 슬프고 밝으면서도 우울함을 내재한 재즈와 아리랑은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어서 잘 통한다"며 "아리랑과 재즈는 죽을 때까지 함께할 친구 같은 음악"이라고 설명했다.
2001년 고려극장을 정년퇴임한 그는 현재 카자흐스탄 유소년재즈오케스트라와 알마티 시향의 빅밴드 지휘를 맡고 있다. 재즈 보급을 위해 2006년에는 '프로재즈'라는 재즈오케스트라를 창단하기도 했다. 재즈를 널리 알리고 민족음악 발전에 힘써온 공로를 인정해 카자흐스탄 정부는 지난해 안 씨에게 문화체육부 공훈 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예전에는 고려인 성악가와 클래식 연주가 등 음악가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돈이 안 된다며 다들 기피해 안타깝다"며 "뒤를 이을 후배는 없지만 힘닿는 데까지 고려인의 음악을 전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wakaru@yna.co.kr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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