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솔 작가 "인간의 보편적 정신은 불변…성공-실패 균형에 희망 있어"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세상 어디에도 있는 듯하고, 어디에도 없는 듯하게 비밀스러운 조직과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페인트 회사가 있다.
경쟁업체들이 절대 모방할 수 없는 특별한 페인트를 만드는 이 회사는 전 세계에 조직을 뻗치고 분자화된 직원들의 노동력을 공급받아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기능한다. 언뜻 보면 노동 착취를 일삼는 무시무시한 초국적 기업을 떠올리게 하지만,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다. 환경에 전혀 해를 끼치지 않으며 전 세계 직원들에게 똑같은 수준의 높은 임금과 복지를 제공하고 남는 수익은 무조건 사회에 환원한다. 이 페인트는 사람들이 몸에 바르고 다닐 정도로 무해해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마저 없앴으며, 뛰어난 방수성과 내연성 등 독보적인 성능으로 가난한 이들의 보금자리를 지켜주는 등 인류의 생활에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이런 꿈에나 있을 법한 회사가 100년을 가지 못하고 소멸했다. 왜일까.
김솔(45) 작가의 새 장편소설 '보편적 정신'(민음사)은 이렇게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있는 한 페인트 회사의 생성과 번창, 쇠락과 소멸의 과정을 그리며 그 안에서 인간들이 어떤 역할을 하고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말한다.
회사의 창업주는 포르투갈에서 태어나 브라질로 건너갔다가 연금술사인 스승을 만난다. 그에게서 사람을 주변의 색과 똑같은 색으로 만들어 정체를 감춰주고 그 상태로 늙지도 죽지도 않게 해주는 신비로운 붉은 페인트 시료를 받게 되는데, 스승이 사라진 뒤 포르투갈로 돌아와 그것을 재현하려 끊임없이 실험하지만, 결국 실패로 끝난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 회사에서 판매하게 된 특별한 페인트이다. 이 페인트의 효능을 알게 된 소비자들의 빗발치는 주문에 공장이 설립되고 회사가 점점 커진다. 2차대전과 자본주의의 부침, 세계 각국의 정치적 상황 등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회사는 번창하지만, 결국 내부 시스템에서 발생한 일련의 오류들을 바로잡지 못해 무너진다.
연금술에서 시작해 초국적 기업으로 이어지는 기묘한 설정과 후반부로 갈수록 실체가 드러나는 창업주 등 인물들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워 강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반면, 소설의 앞부분은 다소 어렵다. 유기체와 같이 움직이는 회사의 시스템과 프로세스, 소멸에 이르게 된 과정을 분석하는 보고서 같은 건조한 문장들은 몇 차례 반복해서 읽어야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 더 진득하게 읽어나가다 보면 이 이야기가 향하는 '보편적 정신'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고, 결말에 이르면 작가가 명확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견고한 매듭을 만나게 된다. 조금은 어려운 여정이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고지에 올랐을 때 맛볼 수 있는 성취감마저 느껴진다.
분명 한국문학에서는 이전까지 보지 못한 특이한 소설이다.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쓰게 된 것일까. 그의 이력을 보면 약간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2012년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한 뒤 지금까지도 전공과 관련이 있는 한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계간 '세계문학'에서 청탁을 받아서 등단 이후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이에요. 그게 2년 있다가 책으로 나오는 건데요, 신인이고 장편 첫 작품이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내가 회사 생활을 하고 있고 공대 출신이니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써야 오래 쓰겠다 싶어서 공장 이야기를 떠올리게 됐습니다. 거기에 제가 좋아하는 책들인 조지 오웰의 '1984'와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엮어봤어요. 사회 시스템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만들다 보니 좀 기괴해졌네요. 제가 권투선수로 말하자면 인파이터가 아니라 아웃파이터여서 인파이팅 방법을 모르겠어요. 가독성 있게 쓰는 방법을 몰라서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어요."
김솔 작가는 11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얘기하며 웃었다.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상적인 회사가 결국 망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이유는 뭘까.
"단순히 인간이 어떤 조직의 한 부위에 지나지 않는 차원이 아니라, 그 부위 사이의 관계들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고 그것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선의 의지를 가진 행동일지라도 그것이 결과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전혀 예상치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지요. 사회에 해악을 미치지 않고 좋은 영향을 주는 이상적인 회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과 조직의 이야기를 풀다 보니 결국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가 되더군요."
회사는 망하지만, 소설의 결론은 결코 디스토피아가 아니다.
"인간은 1세기 전이나 1만 년 전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상황이나 시대, 조건이 바뀌어도 본질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거죠. 유전자나 물질적인 변화가 있겠지만, 그 반대에는 인간의 보편적 정신이 있어서 부정적인 결과 가운데서도 인류애가 가능했다고 봅니다. 연금술에서는 납이라도 언젠가 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데, 사람이나 사회, 시대도 그와 같아서 어떤 사람, 어떤 사회이든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성공이나 실패도 마찬가지지요. 언제나 동시에 이뤄지기 때문에 그 균형으로 이 사회가 유지되고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있는 거죠."
그는 '보편적 정신'이 무엇인지를 소설의 말미에 이렇게 썼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 환경에 대한 최소한의 채무 의식,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경외감이야말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보편적 정신이 아닐까. 인생이란 불완전한 인간이 조물주의 선한 창조물로 환원되는 과정이다."(156쪽)
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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