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난 사고 빈발한 태안 앞바다…"내륙 뱃길을 뚫어라"
530년간 10여 차례 개착 시도했지만 대역사 끝내 실패
(서산·태안=연합뉴스) 조성민 기자 = "거울바다[鏡海] 지나가니 / 현기 나서 어렵도다 / 안흥진(安興鎭)이 여기로다 / 관장항(關障項·여울목 이름)을 다다르니 배머리를 그릇 둘러 / 만학천봉 석각이라 / 앞뒤 사공 겁을 내어 / 돌머리를 박겠구나 / 이어차 이어차 / 아차아차 어찌할고 저어다오 / 내 격군(格軍·사공의 조수)아 / 천우신조 무사다행 넘어서도 염려로다"
조선 후기 지금의 익산에 소재한 함열군을 다스리던 군수 조희백(趙熙百·1825∼1900)이 고종 12년(1875년) 3월 25일, 조정에 바칠 조세를 싣고는 성당창(聖堂倉·익산 성당리 소재)을 출발해 한양으로 가는 바닷길에서 겪은 일을 노래한 가사 '도해가(渡海歌)'의 한 구절이다.
지금의 충남 태안 인근 바다를 지날 때의 험난함을 이렇게 읊었다.
그랬다. 이 앞바다는 뱃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난파와 죽음의 두려움을 주는 곳이었다. 그런 곳은 피해 돌아가면 될 것 아니냐 하겠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이곳은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길목이었고, 그래서 배는 언제나 이 바다를 지나야 했다.
비록 번번이 미완성에 그치기는 했지만, 굴포운하(掘浦運河)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지중해와 인도양을 잇는 수에즈운하(1869년 개통),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운하(1914년 개통)보다 수백 년 앞서 이 땅에서도 그에 버금가는 대규모 운하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충남 서해안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잇는 굴포운하.
고려와 조선시대 대표적인 토목공사로 꼽히는 이 운하는 태안·서산 사이에 뱃길(해로)을 내는 대역사였다.
고려 인종(1134년) 때부터 조선 현종(1669년) 때까지 530여년간 10여 차례나 시도됐지만 끝내 성공하지는 못했다.
공사 중 대형암반이 발견되거나, 팠다 하면 토사가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천수만과 가로림만 높낮이가 다른 지형적인 측면도 걸림돌로 작용한 것이다.
태안군(504.8㎢)이 제주도(1,809.9㎢)에 이어 한반도에서 두 번째 크기의 섬으로 바뀔 수 있었던 굴포운하 굴착 시도는 미완의 역사로 현재까지 이어진다.
최근 들어 이 운하가 해로 기능은 물론 관광자원으로 재조명받지만 이렇다 할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는다.
◇ 조정에 보내는 세곡선을 보호하라
조선 중종 때 완성된 팔도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충청도 태안군에서는 안흥량(安興梁)을 소개하면서 이르기를 "군 (소재지) 서쪽 34리에 있다. 옛날에는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렀는데, 바닷물이 험해 조운선(漕運船)이 이곳에 이르러 번번이 난파했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싫어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고 했다. 난행량이란 글자 그대로는 운항이 힘든 여울목이라는 뜻이다. 실제 조난사고가 빈발하므로 재수 없는 이름이라 해서, 편안하게 지나거나 지내는 곳이라는 뜻으로 바꾼 셈이다.
고려 '서울' 개경과 조선 '서울' 한양은 그 위치 때문에 호남이나 영남 지역에서 조정으로 보내는 세곡은 대부분 조운선을 이용했다.
하지만 그 주요 항로인 태안 안흥 앞바다는 풍랑이 거센 대표적인 험로여서 이들 세곡선을 지키려는 방편의 하나로 운하 굴착이 시도됐다.
그 결과 현재의 태안군 태안읍 인평·도내리와 서산시 팔봉면 진장·어송리를 잇는 총연장 6.8㎞의 남쪽 천수만과 북쪽 가로림만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내륙 뱃길 개척작업이 시작됐다.
고려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도된 굴착공사는 4㎞가량만 완공하고, 바닥이 온통 암반으로 이뤄진 난공사 구간 2.8㎞를 남기고 실패를 거듭하다 결국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 논물이 남북으로 갈라져 내려가는 곳
태안군 남면 인평리의 한 야트막한 야산에 만든 논에서 물을 흘려보내면 한쪽은 북쪽 가로림만으로, 한쪽은 남쪽 천수만 쪽으로 흐른다.
주민들은 이곳을 '판개논'이라고 부른다. 운하를 만들려고 계곡을 판 곳이라서 얻은 이름이다.
주변 곳곳에 길게 운하를 판 흔적이 남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논이나 밭으로 쓰이기도 하고, 작은 저수지로 변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태안군이 만들어 설치한 굴포운하 안내판과 남북으로 길게 고랑이 파여 비교적 원형이 잘 보전된 곳에 만들어 놓은 관찰로를 겸한 목재 데크가 이곳이 굴포운하 예정지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태안군의 실측 결과 남아 있는 운하 흔적 중 밑바닥이 제일 좁은 곳은 14m, 윗부분의 제일 넓은 곳은 63m에 이른다.
높이는 낮은 곳이 3m에 불과하지만 깊은 곳은 50m에 달해 대규모 토목공사가 진행됐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바닥은 조금만 파 내려가면 대부분 통으로 된 암반이다.
현재 기술력으로는 몇 달이면 너끈하게 할 수 있을 굴착공사이겠지만, 그 옛날 기술력으로는 크고 단단한 화강암 암반을 손쉽게 파헤치긴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천수만과 가로림만은 한반도에서 조수간만 차가 가장 심한 곳 중 하나여서 더 토목공사가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 '국내 최초 운하'가 문화재 지정조차 안 돼
역사적으로 귀중한 자료이기도 한 굴포운하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서적과 현장의 흔적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정식으로 문화재 신청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0년 이후 서산과 태안의 향토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굴포운하 재조명 운동이 일면서 2009년 충남도에서 굴포운하 건설사업 타당성 연구용역을 발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본격 발굴이나 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정확한 실태 파악이 안 된 상태다.
당시 충남도 연구용역이 굴포운하 건설사업 재개와 관광객 유치, 서해안 일대의 물류비 절감 등을 목표로 야심 차게 출발했지만, 이미 천수만에 접한 지역이 B지구 방조제로 막혀 있는 데다 관광자원 개발 부분에 초점이 맞춰서 정작 굴포운하 자체에 대한 연구와 조사 등에 소홀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굴포운하 유적이 서산과 태안 경계에 있다 보니 해당 자치단체에서 개발이나 보전방안 마련 등에 선뜻 나서지 못한 것도 규명이 늦어진 이유로 꼽힌다.
이 때문에 향토사학자들은 서산시와 태안군이 협력하거나 충남도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우영 태안향토문화연구소장은 "그동안 문헌 등을 통해 굴포운하의 성격 등이 어느 정도 밝혀진 만큼 이제는 무엇보다 굴포운하 현장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며 "더 늦기 전에 굴포운하 예정지에 대한 시굴조사 등을 통해 500여년간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조사와 확인절차를 거쳐 문화재로 등록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소장은 "이후에 어떻게 보전하고 개발하고 활용해야 할지 전문가와 지역민의 의견을 들어 방향을 잡아나가는 것이 맞다"라며 "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원들도 우리나라 최초라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굴포운하에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굴포운하 관련 유산이 있다. 바로 태안 앞바다가 '바닷속 경주'로 떠오르고 있다. 해저엔 수백 척에 이르는 침몰선박이 매몰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중 몇 척은 이미 발굴돼 각종 보물을 선사했다. 조상들에게 이 바다는 비극이었지만, 그 비극은 또 하나의 '경주'를 선사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min365@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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