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조사 통해 '언론장악' 실태 드러나…"비판적 연예인·언론인 감시·퇴출"
(서울=연합뉴스) 방현덕 기자 = 방송사 운영에 부당하게 개입한 혐의 등으로 17일 재판에 넘겨진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은 KBS·MBC 등 공영방송을 주요 타깃으로 삼아 권한을 남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원 전 원장의 지시를 받은 국정원은 방송의 세세한 내용이나 출연진의 성향을 문제 삼으며 방송국 경영진을 압박했고, 직접 요원을 투입하거나 관제 단체를 동원해 방송 제작에 입김을 넣으려 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정당국 등에 따르면 국정원은 2009년 당시 김주성 기획조정실장을 중심으로 '좌파 연예인 대응 태스크포스(TF)'를 꾸렸다. KBS, MBC, SBS 등 지상파 방송사들의 콘텐츠를 '친정부적으로' 만들려는 작업에 TF가 동원된 것으로 전해졌다.
국정원 정보관(IO)들은 그해 12월부터 방송국 경영진을 수시로 만났다.
이들은 정부에 비우호적인 시사프로그램의 방향을 수정하고, 정부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드라마 제작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거나 정부 비판적 성향의 연예인에 대한 하차 등을 압박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실제로 2010년 3월 국정원은 KBS 개그콘서트에 대해 "정부 정책을 부정적으로 풍자하지 않도록 검열을 강화해달라"고 노골적으로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봉숭아학당 코너에서 개그맨 장동혁씨가 정부의 대학등록금 정책이나 교육계 상납비리, 지방자치단체의 호화 청사건립 등을 꼬집는 코미디를 했다. 이 코너는 대중적 인기를 얻었지만, 보수단체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국정원은 이명박 정부에 비판적인 연예인들의 신상 정보와 주요 행적을 수집한 '블랙리스트'도 직접 만들었다.
2010년 8월 무렵에는 무려 100여명이 이름을 명단에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은 이들을 '강성'과 '온건'으로 나눈 뒤 강성에 대해서는 방송·광고에서 퇴출하는 '고사 작전'을, 온건에는 정부 발주 광고 캐스팅 등 '회유 작전'을 벌였다고 사정당국은 파악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 사회를 본 방송인 김제동씨의 경우 방송에서 퇴출당했을 뿐 아니라 프로포폴 중독설 등에 시달리기도 했다.
방송인 김미화씨도 라디오 등에서 중도 하차했고, 배우 문성근씨와 김여진씨는 합성 나체사진이 나돌며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등 피해 사례가 이어졌다. 국정원은 선거관리위원회에 특정 연예인들의 활동을 감시해 달라고 하거나, 국세청에 기획사 세무조사를 사주하기도 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언론인 역시 국정원이 감시하던 대상으로 분류됐다. 국정원은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 판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KBS와 MBC, SBS 선거기획단 기자들의 언행과 성향 등을 파악한 것으로 드러났다.
KBS의 경우 간부들의 성향까지 수집하고 일부 인사의 퇴출을 시도한 정황이 확인됐고, 2010년 3월에는 방송통신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압박해 정부 비판적 PD들의 방송 관련 시상식 수상을 막기 위한 시도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국정원이 정작 언론매체에 비치는 자신들의 모습을 미화하려고 했다는 사실도 검찰 수사에서 처음 드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은 한 대학교수에게 '국정원 찬가'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는가 하면 2010년 4월에는 KBS에 "드라마에 나오는 정보기관 직원을 긍정적으로 묘사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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