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취한 50대, 주인과 다툰 뒤 주유소서 휘발유 사와 불 질러
건물 입구부터 불길 '활활'…심야시간대 대피로도 없어 피해 키워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안홍석 현혜란 김예나 기자 = 술에 취한 50대가 심야에 여관에 불을 질러 투숙객 5명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 남성은 여관 주인에게 성매매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구입해 범행에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투숙객이 모두 잠든 시간대였던 데다 인화물질로 불이 급속히 번졌고, 대피로조차 마땅치 않았던 점 등이 복합적으로 피해를 키운 요인으로 분석된다.
◇ 난데없는 화재에 투숙객 참변…5명 사망·5명 부상
화재는 20일 오전 3시께 서울 종로구 종로5가의 한 여관에서 발생했다. 오전 3시7분께 신고를 접수한 소방당국은 차량 50대와 소방관 180여명을 현장에 투입해 약 1시간 만에 화재를 완전히 진압했다.
당시 여관에는 10명이 투숙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 화재로 투숙객 중 5명이 숨지고 4명이 다쳐 소방당국에 구조돼 병원으로 후송됐다. 1명은 창문을 이용해 스스로 탈출했으나 역시 부상을 입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부상자 가운데 2명은 병원으로 옮겨질 당시 심폐소생술(CPR)을 받을 정도로 위중했으나 이후 호전돼 생명에 지장이 없는 상태로 전해졌다.
사망자는 1층에서 4명, 2층에서 1명 발견됐다. 연령대는 20대에서 50대에 걸쳤고, 남성이 2명, 여성 3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자 가운데는 가족으로 보이는 3명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경찰이 정확한 사실관계를 확인 중이다. 피해자 10명 중 2명은 2년 전부터 여관에 장기투숙하고 있었고, 1명은 3일 전부터 투숙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내가 불을 질렀다"며 스스로 112에 신고한 중식당 배달직원 유모(53)씨를 여관 인근 대로변에서 현행범으로 체포해 조사하고 있다.
◇ 성매매 거부당하자 홧김 방화…주유소서 휘발유 구입
방화 피의자 유씨는 술을 마신 뒤 여관에 들어가 업주에게 성매수를 요구했다가 거부당하자 말다툼한 뒤 앙심을 품고 인근 주유소에서 휘발유 20ℓ(2만원 상당)를 구입해 여관으로 돌아와 불을 지른 것으로 파악됐다.
유씨는 경찰에서 "술에 취해 성매매 생각이 났고, 그쪽 골목에 여관이 몰려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무작정 그곳으로 가 처음 보이는 여관으로 들어갔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씨는 여관 업주에게 "여자를 불러달라"는 취지로 성매매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말다툼을 벌인 것으로 조사됐다.
유씨는 범행에 앞서 오전 2시6분 경찰에 전화를 걸어 "투숙을 거부당했다"고 신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여관 업주도 2차례 신고했고, 경찰은 오전 2시9분 현장에 도착했으나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해 사안을 종결했다.
경찰 관계자는 "유씨가 술에 취해 있었지만 말이 통하는 상태였고, 출동 당시 여관 앞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며 "이런 극단적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어 보여 자진 귀가조치로 종결했다"고 밝혔다.
이후 유씨는 인근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사온 뒤 여관 문을 열고 들어가 1층 바닥에 뿌리고, 주머니에 있던 비닐 종류 물품에 불을 붙여 던졌다.
유씨가 불을 지른 뒤 스스로 신고한 이유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경찰은 전했다. 유씨에게는 방화나 주취폭력 전과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유씨를 상대로 범행 동기와 수법 등을 추가로 확인한 뒤 현존건조물 방화치사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계획이다.
◇ 한밤중+인화물질+낡은 건물…화재 악조건 다 갖춰
사건 발생 시각이 한밤중이었고, 범행 도구로 휘발유라는 인화물질이 사용된 데다 건물이 노후한 점 등 여러 요인이 겹쳐 피해가 커졌다.
불이 나자 인접한 업소 종업원 등이 뛰쳐나와 소화기 10여개로 초기 진화를 시도했으나 불길이 워낙 빠르게 번져 역부족이었다. 적지 않은 양의 휘발유가 급속도로 불길을 키운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노후도 피해가 커지는 데 일조한 요인으로 분석된다. 해당 여관은 연면적 103.34㎡의 지상 2층 규모에 옥상 가건물을 얹은 형태로, 1964년에 사용이 승인돼 지은 지 50년이 훨씬 넘었을 만큼 낡았다.
객실 출입문은 나무로 돼 있었고, 건물 안에는 이불 등 가연성 물질이 많았으나 불이 났을 때 자동으로 물을 뿌려줄 스프링클러는 건물 용도와 연면적상 설치 대상이 아니어서 구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옥상에 창고 용도의 가건물이 있어 투숙객들이 위쪽으로 대피할 수도 없었다. 경찰은 옥상 건물 설치에 위법성이 있는지도 추후 확인할 계획이다.
해당 건물에 후문이 있기는 했으나 평소 거의 쓰지 않아 투숙객이 찾기 어려웠고, 주변은 담으로 막힌 상태였다. 사실상 유일한 대피로인 입구가 불길에 휩싸인 상황에서 투숙객들의 피신이 한층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사건 발생시간대가 오전 3시께로 투숙객이 잠든 때여서 신속한 대응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도 피해를 키운 한 요인으로 분석된다.
경찰 관계자는 "휘발유가 불이 잘 붙고, 유증기 형태로 순식간에 공중으로 번진다"며 "옛날 건물인 데다 좁고 새벽시간대여서 피해가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날 화재 현장을 둘러본 뒤 많은 인명피해가 난 데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표했다.
박 시장은 자신의 트위터에 "종로5가 방화로 인한 화재현장에 다녀왔다"며 "5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투숙을 거부했다고 휘발유를 뿌려 화재가 나다 보니 투숙객이 피할 틈도 없이 변을 당한 것 같다.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라고 적었다.
이주민 서울지방경찰청장도 이날 현장을 찾아 경찰 관계자들로부터 상황을 보고받고 철저한 조사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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