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비정규직 9%·KBS는 55%…"왜곡된 방송사 노동구조 바로잡아야"
故 이한빛 PD 기리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지원키로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
박원순 서울시장이 24일 열린 'tbs교통방송 프리랜서 정규직화' 발표 자리에서 고(故) 이한빛 프로듀서(PD)의 유서를 읽었다. 이날은 이 PD의 서른 번째 생일이었다.
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신입 조연출이던 이 PD는 과도한 업무 강도와 이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강요해야 하는 상황을 비관해 2016년 10월 28살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 시장은 "즐거운 방송 뒤에, 위로가 되는 드라마 뒤에는 노동자가 있다"며 "프리랜서로 일하지만 실제로는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하는 tbs교통방송 비정규직을 대한민국 최초로 정규직화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시 본청과 산하기관 비정규직, 무기계약직의 정규직 전환을 이어온 서울시가 이번에는 방송국 비정규직 문제를 꺼내 들었다.
박 시장은 서울시 산하 tbs교통방송의 프리랜서와 파견용역 직원을 정규직화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이 조치가) 대한민국 방송국·언론사 수많은 프리랜서의 노동현장으로 확장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tbs교통방송은 전체 구성원 290명 가운데 90.3%(262명)가 비정규직이다. 그나마 정규직은 1∼2년 근무하면 다시 서울시로 복귀하는 시 공무원 14명과 관리 운영직 2명 등이 전부다.
tbs처럼 공영방송의 성격을 띤 KBS의 경우 총원 4천602명 중 55%(2천444명), EBS는 854명 중 32.7%(279명)가 비정규직이다.
서울시는 영국 BBC, 독일 ARD 등 외국 공영방송사들의 예를 들어 국내 공영방송의 비정규직 규모가 외국의 5배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BBC 총원 2만1천133명 중 비정규직은 9%(1천987명), ARD는 2만2천711명 중 23.3%(5천293명)로 국내 공영방송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프랑스 공영방송 텔레비지옹은 전체 5천116명 중 비정규직이 7.7%(1천491명) 수준이다.
국내 방송계 전반에 만연한 프리랜서는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방치돼왔다. 근로기준법과 4대 보험, 휴가와 수당, 최저임금을 적용받지 못했다. 인권 침해나 성희롱이 발생해도 고용이 불안해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웠다.
국내 방송작가 624명을 조사한 결과 표준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는 응답이 93.4%에 이를 정도였다. 이 설문조사에선 일방적으로 노동조건이 변경된 경험을 했다는 응답이 55.1%, 일을 하고도 돈을 못 받은 적이 있다는 응답은 51.2%, 급여 체불 경험이 있다는 응답이 42.3% 나왔다.
서울시는 방송사 프리랜서의 '좋은 일자리'가 무엇인지 제시하겠다며 tbs 프리랜서 272명의 정규직 전환을 통한 고용안정을 약속했다.
이와 함께 서울시는 고 이한빛 PD의 유가족과 언론노조가 만든 '한빛재단'에서 추진하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조성에 협조하기로 했다. 센터는 방송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활동을 하게 된다.
이한빛 PD의 동생 이한솔 씨는 "지난 1년간 세상이 조금씩 바뀌며 공영방송이 정상화됐고, 노동자들이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확장되고 있다"며 "몇십 년간 아무 얘기도 못 했던 드라마 방송 판에도 균열이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씨는 tvN 드라마 '화유기 사건' 등을 보면 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면서 "방송 노동현장은 꼬일 만큼 꼬였기에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화유기' 세트장에서 스태프가 작업하다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도 현장 작업이 중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열악한 방송 노동현장은 다시 한 번 도마 위에 오른 상태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는 방송인 신문고를 만들고 노동 상담, 교육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 또 업무 공간 내에 휴게 공간을 만들어 쉴 권리 보장에 나서기로 했다.
김한길 언론노조위원장은 "방송 제작 현장에서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의 노동 인권을 걱정했던 고인의 바람을 되새기는 날 tbs 프리랜서 정규직 전환 방안이 나와 뜻깊다"며 "tbs와 한빛센터로부터 시작된 방송 제작 환경과 노동 인권 향상을 위한 노력이 지상파와 지역 방송은 물론 종편, 케이블, 제작사 등 미디어 산업 전반으로 확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cho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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